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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Oct 03. 2020

조명의 비극 (택시드라이버)

영화 속 인물 돋보기

 영화는 밤거리를 비추며 시작된다. 밤거리의 사물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각양각색의 조명에 비친 인물과 사물은 원래 모습이 아닌, 그를 비추는 조명의 색으로 빛난다. 택시 운전사인 트래비스도 그중 하나다. 밤거리 택시 운전석에 있는 그의 얼굴은 조명으로 빛난다. 택시는 운전자인 트래비스가 아니라, 탑승하는 손님에 따라 성격이 바뀐다. 택시는 술 취한 사람의 토사물로 덮일 때도 있고, 싸움에 휘말린 손님의 피로 물들 때도 있다. 밤거리 조명 아래 놓인 사람과 현상의 진짜 색은 무엇일 지에 대한 질문. 영화는 그 질문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트래비스를 따라다니고, 때로는 그의 독백을 빌려, 트래비스란 인물을 설명하려 애쓴다. 문제는 인물을 설명하려 애쓸 뿐, 그가 어떤 인물이며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트래비스는 제대 후 특별한 재능이나 관심사를 찾지 못하고 택시 운전사 일을 하게 된다. 또 별다른 이유 없이 만나는 여자마다 추파를 던지고 다닌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인과관계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트래비스라는 인물의 특징이며, 이로 인해 관객은 트래비스라는 인물을 가늠하기 힘들게 된다.


 트래비스는 영화관 직원에게 다짜고짜 이름을 물어봐 퇴짜를 맞기도 하는 반면, 능숙하게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평소 보는 포르노 영화를 함께 보자고 해 영영 그녀를 떠나보내기도 한다.  


 “당신을 보면 크리스토퍼슨 노래가 생각나요. 현실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노래했어요.” 그녀는 트래비스와 이야기를 하며 트래비스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관객 또한 마찬가지다. 트래비스의 출신은 물론 기본적인 성향을 알지 못한다.     


 그는 창녀, 주정뱅이, 마약중독자들이 돌아다니는 밤거리를 증오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주무대 역시 밤거리다. 밤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 또한 모순적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줄거리나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며 후보에게 우호적이다가도 어느 순간 돌변해 그를 암살하려 한다. 그 또한 이뤄지지 못하고, 거리에서 소녀들의 성을 팔던 무리를 죽이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게는 악질적인 갱단을 소탕한 것처럼 묘사된다. 트래비스라는 인물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전달받고 싶어 하는 관객들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는 전개에 의아해진다.


 그런 점에서, 영화 <조커>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맡았던 아서와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확연히 다르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인물이 의도치 않은 일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비슷하지만, 주인공에 대한 공감의 정도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는 정도의 차이가 크다.     


 <조커>의 아서는 희귀한 질병을 가지고 있고, 아픈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며 생계를 꾸리기조차 힘들다는 점이 분명히 나온다. 또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며, 모두에게 멸시받고 있다는 것도 명시된다. 작품에 드리운 음울한 음악과 어두운 시각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아서라는 인물을 공감하게 하고,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한편 <택시 드라이버>에서 관객은 트래비스에게 적극적으로 공감할만한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트래비스가 종종 마시는 물통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그가 왜 밤거리를 싫어하는지와 같은 인물의 행동이나 감정을 유추할 수 있을 법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가 등장할 때 자주 나오는 음악이 있다. 멜로디는 있으나 긴장감을 고조시키거나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일상적인 풍의 음악이다. 보통 영화에 삽입되는 음악이 영화의 몰입을 돕는 데 쓰이는 것과는 달리 이때 음악은 마치 트래비스에 대한 이해, 영화를 연속성을 가지고 따라가려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음악적인 변주나 발전 없이 트래비스 곁에 기계적으로 따라붙는 음악을 통해 영화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일부러 단편적으로 제한해서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리스 알아?” 후보 암살에 실패한 트래비스는 소녀들의 성을 파는 무리에게 찾아가 소녀의 진짜 이름을 묻고는 모른다고 하자 그를 죽인다. 이 살해를 시작으로, 트래비스는 성 매매 일당을 소탕하고 자신도 죽으려 하지만 총알이 떨어져 죽지 못한다.


 목과 팔에 총상을 입은 트래비스는 회복해 영웅대접을 받는다. 또 떠났던 배시는 트래비스의 택시에 탄다. 별 말없이 그녀를 내려주고 비치는 마지막 장면, 밤거리 풍경은 결국 돌고 돌아 첫 장면과의 수미상관을 이룬다. 밤거리의 조명이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저마다의 색으로 왜곡하는 것처럼 <택시 드라이버>가 진행되는 내내 관객은 인물의 주변을 맴돌고, 사건의 주변을 맴돌다가 끝나는 것처럼 말이다. 트래비스가 저지른 사건 역시 미디어라는 조명이 왜곡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희극을 가장한 비극일 뿐이다.


 트래비스가 내내 경멸하며 말했던 밤거리의 ‘비에 씻겨 내려가야 할 쓰레기’ 같은 존재들은 밤거리 조명에 왜곡되어 본질을 잃은 트래비스 자신을 포함한 존재들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트래비스는 전후 미국, 혹은 전쟁을 겪은 이들이 지니는 허무함을 대변한다. 개개인의 삶이나 생명에 관한 본질적인 명분은 상실된 채, 정치적 논리, 신화화된 국가와 같은 허울 좋은 명분이라는 조명에 비친 유약한 존재. 또 그런 명분을 내세웠음에도 패한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치욕이다. 밤거리 조명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취해있던 사람이 느끼는 부끄러움이다.


 동시에 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본질적인 한계 속에서 비슷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언뜻 뭔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나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한, <택시 드라이버>에 남겨진 지루하고도 비극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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