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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Jun 12. 2023

당신의 세계 (더 웨일)

영화 속 공간 돋보기 

 영화 <더 웨일>은 사무엘 D. 헌터가 쓴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는 마치 연극 구성처럼 5막으로 이뤄진다. 각 막에서는 272kg의 거구인 찰리의 월요일부터 금요일을 보여준다. 애인과 사별 후 급격히 살이 쪄 심장 질환 등 여러 합병증을 앓고 있는 찰리가 죽어가는 그의 생의 마지막 일주일이다.   

 영화는 찰리의 공간에서만 진행된다. 찰리는 육중한 몸 때문에 거의 움직이지 않고 집 안에서만 지낸다. 영문학 강사인 그는 집에서 원격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그 외에는 배달 음식을 먹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의 마지막 일주일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자신을 둘러싼 관계에 솔직히 맞서고 생의 후회가 남지 않도록 충분히 슬픔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찰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구원한다.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는 찰리에게 구원이란 영생이나 천국과 같은 종교적 구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구원’은 그의 삶 전체에 주변 사람들의 용서를 받음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찰리는 죽는 순간에 여한 덜어내고 떠났다. 마지막 부분에서 까치발을 든 찰리의 몸이 들리는 장면에서 마지막에 구원을 얻은 그의 홀가분함이 보인다. 찰리의 마지막 일주일은 어땠기에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 

 찰리는 누가 보아도 죄가 많은 사람이다. 아내와 8살 난 딸과 같이 살던 그는 대학 야간 수업에서 강사와 학생으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딸을 두고 떠난다. 그러다 연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실의에 빠져 집에서만 지내고 음식을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다가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살이 불어난 것이다. 기독교 윤리에 반하는 동성애는 둘째치더라도 아내와 딸에 대한 책임 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여기에 ‘식탐’이라는 죄도 범하고 있다. 이런 찰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우선해야 할 과제는 관객과 찰리의 사이를 좁히는 일이다. 이것은 영화의 주된 공간인 찰리의 집에서 이뤄진다.      

 영화나 텔레비전, 연극 등 시각적인 매체는 관음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이때 관음은 성적 도착증이 아니라 내가 아닌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욕망, 간단히 말하면 오지랖에 대한 것이다. 영화에 나온 공간은 이런 욕망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찰리는 집에서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다. 찰리 외에 다른 인물이 같이 있게 되면 관객은 찰리를 보는 시선을 독점하지 못하고 그 인물과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찰리가 집에 혼자 있는 동안은 그 시선을 독점한다. 게다가 그는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특정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듯한 행동을 하거나 하면 관객은 인물이 행동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 자체로 긴장감을 느낀다. 하지만 관객은 그가 밥을 먹거나, 집게로 리모컨을 줍는 것, 텔레비전을 보거나 에세이를 읊조리는 것만을 본다. 찰리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면서 관객이 찰리에게 가지는 관음의 욕망은 충분히 충족됨과 동시에 그와 가까워진다. 동시에 찰리의 행동에 몰입하고 그의 성격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가령 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고 새가 먹을 빵 부스러기를 챙겨주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그의 따뜻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유머와 긍정성을 잃지 않는 것 등이다. 찰리는 다른 인물들이 집에 들어왔다가 나갈 때 복도에서 나는 발소리를 따라 눈을 따라간다. 심지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 없이 음식을 배달하는 배달부가 문 앞에 음식을 두고 갈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매번 이런 찰리의 시선을 따라간다. 찰리에게 향하던 관객의 시선은 다시 찰리를 매개로 찰리의 시선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반경이 넓지 않은 찰리지만, 그가 자신과 관계된 사람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에 소홀하지 않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는 대사나 특정 사건이 아니라 ‘엿보기’와 ‘시선 공유’를 통해 전달되기에 찰리라는 인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은 찰리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평범하면서도 죄성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을 그와 비슷한 찰리와 동일시하게 된다. 영화는 관음이라는 장치와 주인공의 일상 공유 그리고 카메라 렌즈를 통한 시선 공유를 통해 그가 평범한 사람이자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때문에 특정한 종교와 사회 윤리를 떠나 관객은 자신과 동일시된 찰리라는 영혼이 구원받기를 바라게 된다. 

 그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택한 것은 ‘관계’다. 이는 새로운 관계는 아니며, 엇나간 지난 관계의 극적인 회복도 아니다. 단지 그가 저지른 관계에서 얽힌 것들을 풀어내는 과정이다. 찰리가 택한 방법은 ‘솔직함’이다. 찰리는 그의 아내도 딸도 사랑하면서도 다른 남자도 사랑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이다. 또한 먹는 것을 주체 못 해 엄청나게 살이 찌고 그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다. 영화 속에서 찰리는 희로애락과 인간의 탐욕이 투영된 전형적인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런 보통의 인간이 여한 없이 삶을 마치기 위한 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회복하고 타인에게 보여주었을 때 얽힌 관계는 풀어지고 생의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다.

 관계에는 크게 4가지 요소가 있다. ‘나’ ‘타인’ ‘나의 세상’ ‘타인의 세상’이다. 나와 타인은 독자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내가 이해하는 나의 세상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이다. 타인 역시 그가 전제하는 세상에서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에 나와 타인의 관계는 하나의 관계처럼 보이면서도 서로 다른 관계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부녀관계이지만 아버지의 관점에서 자신과 딸의 관계를 보는 것과 딸의 관점에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는 인간은 자신의 세계에서 사는 인간의 본질에서 온다.  

 결국 나를 온전히 아는 건 나 자신밖에 없으며,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인이 아무리 큰 고통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느끼는 만큼 마음이 아플 순 없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 손가락에 난 가벼운 상처에는 온종일 신경을 쏟게 된다. 영화 초반에서는 이처럼 인간은 공감을 통해 타인에 대해 관심을 지니지만 결국 타인에 대해서는 나만큼 생각할 수 없으며 본인과 타인이 지니는 관계의 역설을 보여준다. 찰리는 세상을 떠난 애인 앨런의 여동생인 리즈의 도움을 받는다. 간호사인 리즈는 찰리의 상태를 봐주고 담소도 나누는 지금 찰리에게 가장 가깝고도 가족 같은 존재다. 그녀는 찰리의 집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찰리와 농담을 한다. 한창 신나서 떠드는데 찰리는 음식이 목에 걸려 숨을 못 쉬고 괴로워한다. 이를 알아채지 못하며 설거지하며 떠드는 장면에서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결국 인간은 각각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세상에 갇혀 있다는 본질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스스로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건 그 자신뿐이다. 관계는 표면상으로는 상호적이고 하나의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각자의 세상을 전제로 서로 다른 각각의 관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화는 단지 본질적으로 고독한 인간과 그로 인해 관계가 지니는 한계에 대해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인간의 본질에서 나아가 구원이 결국 관계에 달려 있다고 본다. 한 인간이 철저히 나일 수 있는 건 역설적이게도 타인이 나와 철저히 다른 타인이어서다. 인간은 철저한 고독함 덕분에 오롯한 자신을 얻는다. 철저히 고독하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타인과 다르고 보편성에서 자유로운 독자적인 존재라는 축복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자신과 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자신으로 만들어 주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갈망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하는 것은 결국 나를 이해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찰리는 자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단절된 관계인 딸 앨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4년여 만의 만남이다. 찰리는 딸과의 재회에서 평범한 사람과 다른 거구가 되어 버린 자신을 솔직히 보여줘야 한다. 찰리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고 떠나버린 아내와 딸에게 어떤 마음인지 솔직히 말한다. 무책임하게 엄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찰리를 원망하는 앨리는 에세이 숙제를 해주고 모아둔 돈을 주겠다는 찰리의 말에 못 이기는 척 찰리를 찾아오면 그동안 방치했던 관계를 보고 받아들인다. 용서와 화해가 아니라 단지 묻어놓고 방치한 관계의 먼지를 털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찰리는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앨리는 친구들을 놀리고 졸업에도 관심이 없는 목표가 없는 방황하는 학생으로 비친다. 그와 동시에 누구보다 솔직한데 아버지인 찰리의 사진을 찍고 SNS에 그의 사진과 함께 “그가 지옥에서 타버리면 활활 잘 타오르겠네”라고 조롱하는 글을 쓰기도 한다. 자신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미움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사진 역시 어떤 합성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찰리의 모습이다. 사실 앨리는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보편적인 도덕과는 어긋나 불편함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만큼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소통하길 원하고 타인과 관계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걸 아는 찰리는 게시글을 보여준 전 아내에게 “이건 사악한 게 아니라 정직한 거야.”라고 답한다. 또 무엇보다 그런 앨리에게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그 조건은 관계다. “앨리가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도 앨리에게 마음을 쓰는지” 그는 자신을 찾아온 아내에게 말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한 영혼의 구원은 결국 스스로가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역설한다. 또한 그 사람들은 객관화되거나 구원받는 사람을 위로하며 일방적으로 동화된 존재가 아닌, 솔직한 개별 주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초반부에 찰리는 학생들에게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에세이를 써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지막 수업에서는 솔직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카메라가 고장 났다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지 않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통하는 사람의 기분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과 동일시되면 나와 타인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공감도 소통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나와 타인은 다를수록 더 깊이 소통할 수 있고 개별 주체는 더 강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때문에 관계를 푸는 것에서 결국 타인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전에 솔직한 나를 마주하고 타인과의 관계 역시 타인의 세계에서 타인과 나의 관계가 아닌, 내가 구축한 세계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여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가 일치하지 않고 다른 것을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오해를 줄여나갈 때 그 관계는 건강하고 개별 주체들이 더 온전해지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속이 상한 앨리는 찰리에게 어떻게 돼도 자신은 신경 쓰이지 않고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막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찰리는 이에 대해 속상해하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이미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녀의 세계와 찰리의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 알기 때문이다. 그는 그 한마디에 심경이 변화되거나 하지 않고 여전히 그녀를 신경 쓰고 그녀의 에세이가 훌륭하다고 한다. 찰리는 그녀가 말은 그렇게 해도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찰리의 집은 어둡고 눅눅해 보인다. 게다가 장마철인 것처럼 날씨도 우중충하다. 자동차가 비가 내린 도로를 지나가며 파도 소리를 내고 비가 내리며 마치 바다 같다. 그렇게 보면 찰리의 집은 어두운 고래 배 속이며 찰리는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작은 영혼처럼 보인다. 찰리는 딸 앨리가 8살 때 쓴 모비딕에 관한 에세이를 자주 되뇐다. 그중에 그가 가장 많이 읊조리는 부분은 “무엇보다 슬펐던 건 저자가 고래에 대한 설명만 길게 하는 부분을 읽을 때였는데, 작가가 잠깐이라도 자신의 슬픈 이야기에서 독자를 구하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다. 그것은 앨리가 단지 독자인 자신의 입장에서 지루한 부분이라고 느낀 것이 아니라, 저자의 입장에서 그 의도를 생각하니 슬프다고 느껴진 것에서 그녀가 자신의 세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세계를 공유하고 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고 뿌듯해서일 것이다. 동시에 찰리 자신과 같이 독특한 외모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겉’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그 이면에 그 슬픈 세계 자체를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구절을 경전의 한 글귀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찰리는 처음 딸 앨리를 만났을 때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한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는 몸을 일으켜 앨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이제야 삶의 무게를 온전히 버티고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찰리의 몸, 그가 사는 집이라는 공간은 곧 찰리 그 자체이며 그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다. 영화는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 세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유도한다. 그의 비대한 몸과 그가 사는 공간과 세계를 공유하며 솔직해질 때,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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