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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음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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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Apr 11. 2023

'음세계'가 온다

 난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어떤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 있을 때도 있다. 7살 무렵 공풀장 밑에 깔려 느낀 죽음의 느낌, 그와 함께 선명히 기억나는 실내 놀이터의 풍경. 초등학교 시절 주먹다짐을 하게 됐는데 나 말고 상대를 응원하던 친구의 얼굴. 그전에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강렬하고 선명한 기억은 5살 무렵 시작됐다.

 엄마는 현관문을 열어 둔 채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놓인 길다란 나무 의자 위에 서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 현관문에는 붉은 발이 쳐져 있었고 문밖에서 들어오는 초여름 햇살이 그 틈으로 비쳤다. 

 기분은 아주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공포를 느껴서 더 즐겁다고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엄마가 아파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곧 세상이자, 전부일 때였던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황급히 옆집 아주머니께 도움을 요청했고, 아주머니는 119를 불렀다. 만삭이었던 엄마는 진통 끝에, 나를 낳았을 때처럼 제왕절개를 했다. 동생이 태어났고, 곧 또 다른 세상이 다가왔다. 음언니가 불러온 ‘음세계’다.

 음언니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음’밖에 없다. 동생 옆에 가만히 있다 보면 정말로 ‘음’만 들린다. ‘음’하나로 소통이 가능한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리 몇천, 몇만 번 ‘오빠’나 ‘아빠’를 반복해 들려줘도 돌아오는 건 ‘음’이 전부다. 가끔 얻어걸려봤자 ‘으음므마’정도였다.

 음세계는 철저히 닫힌 세계다. 쉽게 외부인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 외부인도 굳이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 닫힌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가 쉽지 않다. 심할 경우 그 세계에 취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감정 조절이 어려워지기도 하는데, 소소하게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온갖 걱정과 슬픔을 지닌 사람이 되기도 한다. 아직 어린아이에게는 더 그렇다. 음언니는 아주 일반적이고 무난한 일상을 보내던 내가 나의 가장 차별적인 정체성이 되었다. 그렇게 난 음언니의 세상에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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