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언니는 친구도 없고, 가족 외에 누구를 잘 만나지도 않는다. '음언니'는 동생이 처음으로 누군가에 의해 '불림'을 당한, 거창하게 말하면 동생이 처음 얻은 사회적 칭호다. 거의 집에만 있고 사회 활동은 전무한 동생의 외부 활동이라고는 가끔 하는 산책이 전부다. 동생이 그렇게 불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동생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구나.'하고 왠지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음언니다!” 한 여자아이가 엄마와 산책하고 있는 동생을 보고서는 불렀다고 한다. 동생을 꽤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동생은 모든 표현을 ‘음’ 하나로 한다. 가끔 ‘아’를 비롯한 특별한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음으로 말하는 것이 전부다. 왜 많은 음절 중에 ‘음’일까 생각해봤는데, 음은 입을 벌리지 않고 목에 아주 적은 힘을 줘도 나는 아주 효율적인 소리였다. 이해가 갔다.
동생은 눈치가 거의 없다. 가는 곳이 어디든 기분 내키는 대로 ‘음음~’ 한다. 다 큰 언니가 커다란 휠체어 비슷한 유모차를 타고 있으니, 아이들에게는 눈에 뜨일 만하다. 더구나 그곳에서 ‘음’ 하나로 모든 것을 호령하는 동생이 그 꼬마 눈에는 제법 터프하고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음언니가 인상에 남은 이유일 테다.
우리 가족은 동생의 ‘음’을 잘 알아듣는다. 동생의 ‘음어’를 익히게 된 것은 어렵지는 않았다. 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해서 한 가지를 만 시간 동안 숙련하면 전문가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은(특히 엄마는) 하루 종일 ‘음’을 들어왔다. 만 시간의 법칙으로만 보면 몇 번 전문가가 되고도 남았다.
동생은 이기적이다. 무엇인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모든 걸 자신에게 맞추는 전형적인 ‘센 언니’ 스타일이다. 언어 역시 다른 사람의 말을 배우는 것보다 자신의 표현을 배우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 그렇다면 언어 사용에 있어서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버금간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 음언니에게 교육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 9살 때였나 아이가 한 단어를 학습할 때, 만 번 정도 들어야 말을 한다는 걸 듣고 나서 음언니에게 ‘오빠’라는 단어를 만 번 정도 말해준 적이 있다. 소용이 없었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것에 코페르니쿠스가 콧방귀도 안 뀌었듯, 동생 역시 그랬다. 만 번을 듣고 나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하긴 동생의 ‘음’은 가만히 들어보면 분명 저마다 다르다. 음~ 으.. 음... 음! 으음? 분명 다르다. 나름 표정도 다양하다. 톤이나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 게 귀여워 웃음이 난다. 한마디도 아니고, 한 음절로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드는 사람은 음언니이가 유일할 것이다.
‘음’ 하나로 밥이 나오고, 화장실에 가고, 산책하러 가고, 주변 사람들이 주변을 살펴준다. 음언니이를 보면 ‘음’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힘이 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모든 게 음으로 통하는 '음진리교'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음언니라고 부른 그 아이는 ‘음’에 물들지 않았기에 음언니라는 세월과 진리를 응축하면서도 간결한 별칭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미처 음언니같은 별칭을 못 지어준 것은 너무 그 세계에 물들었던 것일 테고. 음세계에 물들다 보니 음언니의 음이 특별한지도 몰랐던 것이고.
음언니가 동네에서 꽤 유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는 ‘음’하고 돌아다니는 특이한 언니로, 또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장애가 있는 여성으로, 휠체어를 밀며 산책하고 딸에게 애교를 부리는 엄마와 휠체어에 앉은 다 큰 애기로 보이는 딸의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재밌게 해주겠다며 휠체어를 빠르게 미는 오빠와 동생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이를 보고 그림을, 소설을, 악상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음언니라고 불러준 아이처럼 누군가의 뇌리에 음언니가 남아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