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언니는 내게 행복이자 기쁨이자 슬픔이자 무거움이다. 음언니는 또 다른 나다. 깊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덜어낼 마음도 없다. 하지만 음언니는 내게 별 관심이 없다. 찐득하게 붙잡고 늘어지는 건 음언니가 아니라 나다.
음언니를 이해하는 건 나를 이해하는 거다. 음언니가 소리를 낼 때마다 ‘무슨 마음일까?’ 궁금하고 집에 갈 때 즈음이면 ‘음언니는 오늘 잘 지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나와 따로 떼어낼 수 없는 음언니다. 그런 음언니를 평생 이해할 수는 없으리란 것을 안다. 음언니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면 다만 음언니를 보는 나라도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음언니는 내가 이해하는 거의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종교, 부조리, 운명 같은 거대한 문제일 수도 있고, 엄살, 자기 연민, 위선과 같은 시시콜콜한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엄마는 내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서 ‘동생도 있고...’라고 말끝을 흐린다. 동생의 존재가 내가 가정을 꾸리는 데 있어 걸림돌이라도 되는 듯한 뉘앙스다. 인정한다. 같은 값이면 몸 튼튼한 가족이 있는 사람이 났지. 장애가 있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 나을 리는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음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것이니, 음언니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나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진데, 그런 사람과 같이 사는 건 모순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에 같은 값은 없다. 인간은 그 자체로 너무도 다양한 기질과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고, 매 순간이 다른 환경에서 자란다. 같은 값인 연봉은 많아도, 같은 값인 인간은 없다. 연봉이나 다른 조건을 사람값이라 착각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음세계에서 살아온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음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 몸값은 몰라도, 내 영혼값 대부분은 음언니 지분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내 영혼은 많은 부분이 ‘음’으로 물들어 버렸다. 나도 나를 이해하려면 나도 모르게 젖어있던 ‘음의 기운’을 되짚어보고 되살펴 봐야 한다. 생각보다 그런 점이 많다. 그런 부분은 폭등할 때도 폭락할 때도 있다. 마음이 좋았다가, 아팠다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