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중년 여성들이 호프집에서 나온다. 자정이 넘은 시간. 그들은 소녀였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까르르 웃으며 각자의 집으로 흩어진다. 무심코 지나친 집 근처 호프집 풍경이다. 얼마나 즐거울까. 목장에 갇혀 있다가 잠시 자유를 얻어 야생의 풀 맛을 만끽하고 돌아가는 한 무리의 양 떼 같았다. 문득 우리 집에 갇힌 양이 생각났다. 엄마다.
엄마는 여행을 좋아한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TV에서 더 잘 볼 수 있는데 뭘..."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엄마는 "그래도 직접 보고 싶어, 궁금하잖아"라고 한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개척자, 탐험가 정신이다. 하지만 엄마는 평소 자유롭게 기분전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 정도밖에 여행 가는 게 전부다. '양치기 소녀' 음언니 때문이다.
엄마는 평소에도 음언니 밥해주고 약 먹이는 일 때문에 집을 잘 비우지 못한다. 그뿐이면 좋은데, 불시에 경기하는 음언니를 혼자 두고 어디든 맘 편히 못 나간다. 아무리 조심하고 잘 본다고 해도, 가끔은 경기로 인해 다치는 음언니다. 자주 다치는 건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 다치게 되면 그 충격, 잔상은 오래 남는다. 그런 모습은 나에게도 상당한 충격인데, 엄마는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해도 음언니가 눈에 밟힐 것이다. 그렇다고 같이 가자니 기저귀며, 약이며 챙길 게 한둘이 아니다. 요즘은 살이 쪄서 좀 무겁기도 하고.
그렇게 음언니는 큰소리 한 번 안 내고,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엄마를 가둔다. 나와 아버지도 어느 정도 갇히지만 아무래도 엄마만큼은 아니다. 아버지와 나는 별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서 안 가는 것이지 음언니 때문에 안 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엄마가 집 안에 갇혀있는 덕에 덩달아 득을 봤으면 봤다.
언제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엄마 또래 여자들을 보면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가족이라 그런지 집에 가만히 앉아 음언니를 보는 순간만큼은 당장에 다른 아쉬움은 들지 않는다. 그런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도망가지 않을 테니, 양치기 소녀가 음언니가 겁 좀 그만 주고 무사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