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불' 돋보기
영화는 그럴듯한 인물들이 있을 법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지만, 현실은 아니다.
삶은 실존하지만, 그렇다고 삶 속 이야기가 모두 진짜는 아니다.
‘진짜’ 삶을 산다는 건 무엇인가. 단순히 진심을 담아, 혹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과는 다르다. 영화는 ‘불’을 통해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불은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우고서야 꺼진다. 부러지고 망가진 것과 달리 모든 것들을 재로 만들어 사실상 돌이킬 수 없이 만든다. 삶 또한 그렇다.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삶이 불타지 못한다. ‘진짜’라는 불쏘시개가 없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불같은 사랑>을 통해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데뷔했다. 하지만 이는 조감독 시절 스승인 신상호 감독의 원고로 만든 것이었다. 시작부터 자신이 아닌 ‘가짜’로 데뷔한 감독은 그 이후 빛을 발하지 못하고 평단과 영화계도 그를 한물간 싸구려 치정극 감독 정도로 치부한다.
세상이 그를 그렇게 평한다 해도, 그는 ‘진짜’ 삶을 산다. 삼류 감독도 그의 삶이었고, 언젠가 다시 빛을 보겠다는 절치부심의 태도도 그의 진짜 삶이다. 압박감에 우울증 약을 먹는 것도 그의 삶이고 그런 그의 욕심에 꿈에서도 영화 속 장면이 반복되는 것도 그의 삶이다. 그의 삶은 온전치 못해 보인다. 하지만 그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영화에 대한 진짜 열망이다. 그의 삶을 아깝지 않도록 태우는 불쏘시개다.
김 감독은 꿈속에서 뚜렷이 보이는 생각과 영감이 떠올랐을 때 무리한 일정이지만 재촬영을 강행한다. 영화 속 영화라는 액자식 구성에서 나오는 에피소드와 난장판은 비슷한 설정의 연극이나 영화의 그저 그런 클리셰일 수도 있겠으나 코미디적 요소와 뻔한 전개는 클리셰보다는 주제를 숨기는 맥거핀에 가깝다. 주목할 만한 건 김 감독이 김 감독에서 ‘김열’ 감독으로 이름을 찾고 진짜 자기 삶에 불을 지르는 데 있다. 조감독일 때 화재 장면 연출에 몰입하다가 죽은 스승 신상호 감독이 그의 삶 속에서 찾아낸 열정으로 태운 ‘불’에서 김 감독의 ‘불’로 옮겨가는 이야기다.
영화 세트장은 가짜지만 이걸 태우는 불은 진짜다. 딱 한 번밖에 촬영할 수 없고, 한 번 모든 걸 태우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 삶과 비슷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삶은 타지 못한다. 불을 지르는 건 저마다의 몫인데, 여러 말들과 세간의 잣대는 쉽사리 자기 삶에 불을 지필 수 없게 한다. 진짜로 사는 건, 또 진짜라는 불쏘시개로 자신의 삶을 태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영화 속 영화의 다소 황당한 결말은 ‘진짜’ 삶의 위대함과 경외를 내포한다.
“거미나 찾아”
“진짜 거미를 풀면 어떡해”
거미를 무서워하는 유림이 연출팀에 불만을 터뜨리자, 김 감독은 무심하게 거미나 다시 거미나 찾아오라고 한다.
거미는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진짜인 존재다. 아무리 실감 나게 연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진짜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가짜에 불과하다. 진짜는 거미뿐이다.
김 감독이 말한 “거미나 찾아” 단순히 극 중 대사를 넘어 극의 저편에 있는 관객 각자의 삶 속에서 ‘진짜’를 찾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뭐가 진짜인지는 밖에서 극을 보는 관객들은 모른다. 그들은 영화를 보고 수군대기만 할 뿐 대역이나 진짜 거미인지 아닌지 구분할 줄 모른다. ‘진짜’를 구분 짓고 진짜로 살아가는 몫은 저마다 삶의 감독인 자신의 몫이다. 용기 내어 불을 지르는 것 역시.
김 감독의 의지대로, 그의 머릿속에 맴돌던 장면들을 촬영하고 나자 비로소 화면은 김 감독의 의자를 비춘다. 비로소 김 감독의 이름이 드러난다. 방금 일어난 그의 무게가 남아있는 의자에는 다수의 ‘김 감독’의 삶이 아니라, ‘김열’이 살아온 삶. 열등감, 패배 의식, 고뇌와 갈등이 함축된 삶이 응축되어 있다. 동일한 기준과 잣대가 아니라 인간 김열만의 진짜 삶이다. 밤샘 촬영을 마친 일출의 강렬한 빛이 의자를 감싸며 마침내 그의 삶에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불이 붙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극중극의 결말에선 ‘진짜’를 상징하는 거미가 가짜인 배우들을 줄로 휘감아 먹이로 삼는다. 마치 가짜 세트장을 진짜 불이 집어삼키듯.
진짜로 삶을 태우는 사람은 의외로 초연한 듯 평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