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and Feb 11. 2024

채찍의 묘 (위플래쉬)

영화 속 ‘인물’ 돋보기

 채찍은 대상을 때리는 수단이다. 동시에 ‘당근과 채찍’이라는 비유가 있듯, 채찍질하는 주체가 대상에게 단순히 고통만을 주기보다는 그를 통해 어떤 행위를 유도하기 위한 촉매가 되기도 한다. 

 이때 채찍질은 채찍을 맞은 상대에게 원하는 반응이 나와야 의미가 있다. 채찍을 맞아도 별 반응이 없는 상대에게는 아무리 해봐야 팔만 아프다. 때린 사람이 바라는 바대로 움직일 때 비로소 필요해진다.  

 플레쳐는 가스라이팅을 하듯 앤드류를 다그치고 악보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면서 앤드류를 극단으로 몰아간다. 앤드류가 학대에 가까운 플레쳐의 요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플레쳐가 극악무도하며 교묘하게 상대를 위축시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앤드류 역시 플레쳐의 채찍질에 내포된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플레쳐의 채찍질은 순간이지만, 앤드류는 손에 피가 터지고 교통사고가 난 상황에서도 드럼 스틱을 잡을 만큼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여기서 드러나는 채찍의 묘는 한 사람의 일방적인 학대가 아니라 ‘상호작용’에 있다. 채찍은 뜻을 같이하거나 가치를 공유하는 상대에게나 통한다. 그런 점에서 앤드류와 플레쳐는 ‘동지’다. 영화에서 플레쳐는 실재하지만, 그 존재는 앤드류 안에서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 플레쳐의 본질은 앤드류의 내면이다. 영화는 언뜻 두 사람의 갈등을 다루면서도, 그 저변은 앤드류의 내적 갈등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내 템포에 맞춰”     

 채찍질의 시작과 끝은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잠시 당근을 줄 순 있어도 채찍의 명분이 남아 있어야 한다. 그 명분이 바로 ‘템포’다.

 플레쳐는 자신의 밴드와 처음 합을 맞춰보는 앤드류에게 자신의 템포에 맞추라고 요구한다. 알 듯 말 듯한 이 템포를 못 맞추면 물건을 던지며 분노한다. 앤드류는 어떻게라도 템포를 맞추려고 하지만, 그 템포는 절대 맞출 수 없다. 앤드류 본인이 가진 리듬이 아닌, 무엇이든 정상이어야 한다는 플레쳐의 템포여서다. 가까스로 맞춘다 해도 곧 어긋나게 된다.    

  


 그 템포는 앤드류의 템포이기도 하다. 친척과 만나는 모임에서 일류가 아니면 소용없다며 비아냥거리고, 좋아하는 니콜에게도 자신에게 우선순위는 ‘최고’가되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며 그만 만날 것이라 말한다. 영화는 이를 ‘열정’의 범주로 보여주지 않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서도 연주를 계속하고 교통사고가 난 채로 무대에 서는 불안에 보이는 앤드류의 모습을 통해 ‘열정’이 아닌 ‘이상’의 범주로 표현한다.   

 

 앤드류와 플레쳐는 잠시 단절된다. 앤드류는 학교를 떠나고, 플레쳐 역시 학대 혐의가 드러나자,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우연한 기회로 그 둘은 다시 만나 호흡을 맞춘다. 플레쳐는 자신을 벗어난 앤드류에게 거짓말을 해 함정에 빠뜨린다. 그를 몰아세우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플레쳐, 혹은 앤드류 그 자신의 한 부분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찰나, 앤드류는 플레쳐의 손짓이 아닌, 자신만의 템포로 밴드를 이끌고 자신의 연주를 이어간다. 플레쳐를 무시하고 모든 걸 던진 혼신의 독주는 권위와 억압적이고 일원적인 사회 질서를 상징하는, 플레쳐와 일류에 집착하는 앤드류 자아의 한 축과 벌인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암시한다. 


 그 싸움은 앤드류가 전에 벌인 살점이 벌어지는 피 튀기는 싸움과는 다르다. 명성과 1등에 눈이 멀어 자신을 갉아먹는 플레쳐와 거기에 동조하는 자아가 하는 채찍질에 눈이 멀어 방향이 어딘지도 모르고 내달린 상처만 남은 경주였다. 

 앤드류의 연주 막바지에 플레쳐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이는 것은 앤드류가 자신의 템포를 따라줘서도, 극한의 한계를 뛰어넘어서도 아니다. 앤드류가 비로소 자신의 템포와 연주를 찾았기 때문일 거다. 플레쳐로 나타나는 앤드류의 자아는 실은 이때를 기다려왔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짓이 아닌, 순수하게 드럼을 좋아하는 앤드류의 박자에 따르는 때를, 채찍질이 통하지 않는 때를.     



매거진의 이전글 무제 (더 랍스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