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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Feb 18. 2024

무색인간 (그린 북)

영화 속 ‘색’ 돋보기

  건반 악기는 배타적으로 생겼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뉜 모습이며, 같은 색이라도 분명한 경계가 있어 갈라지는 모양새를 보면 그렇다. 마치 영화에서 다루는 ‘흑백’의 구분 짓기처럼. 하지만 영화는 단지 피아노를 전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피아노의 흰건반과 검은 건반을 두드리며 나오는 연주를 말한다. 그 연주는 굳어져 범주화되는 ‘음원’과 다르다. 순간에만 유효한 라이브 연주에 대한 것이다.      



 돈 셜리는 60년대 미국에서 묘사되는 전형적인 흑인과는 다르다. 부유하고 고상하며 법을 준수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한다. 반면 토니는 백인이지만 무식하고 때론 주먹이 먼저 나가며 계획도 없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 토니는 집수리를 위해 방문한 흑인이 음료를 마신 컵을 버린다. 떨어진 쓰레기를 버리듯 태연하고 별 감정이 섞이지 않은, 일상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그 흑인과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고 하는 행동은 그 이전 경험에 따른 것도 아닌 당시 미국 사회에서 토니에게 건 범주화의 최면처럼 보인다.   

 토니 역시 ‘범주화’라는 폭력을 당한다. 경찰에게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토니는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린다. 범주화는 그 의미가 좋든 나쁘든 모두 한 개인의 인격을 훼손하고 무시하는 행위다.  


 그 범주가 좋든 나쁘든 간에, 묶이는 것 자체로 개별 인격을 훼손하는 것이다. 범주화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개인을 없애는 행위다. 인종, 국가, 지역, 성별 등 어떤 것이든, 그 크기를 떠나 범주화라는 폭력의 수단이 된다. 전시된 피아노의 흰건반과 검은건반의 88개의 모양새만을 말하며 연주곡의 선율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영화는 막바지에 관객을 시험한다. 눈 내리는 도로에서 경찰이 다가와 차를 세우는데, ‘이번엔 또 무슨 억지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곤경에 처하게 할까’라는 시험이다. 흔한 인종차별과 과잉 진압의 이미지가 씐 미국 경찰, 그리고 이 전에 보여준 영화에서 나타난 경찰의 ‘색’이다. 하지만 이 경찰은 타이어가 퍼졌다며 도움을 줄 뿐이다.   

 인간의 육체는 피아노의 외관처럼 단지 가죽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좀처럼 단지 보여지는 육체가 아니다. 인간은 껍데기가 아니라 고유한 삶을 담은 공연장이다. 그 공연엔 그가 살아오면서 거쳐온 경험과 생각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단 하나의 연주가 울려 퍼진다. 연주는 단 하나이거니와 시시각각 변한다. 

 원래 클래식을 연주하고 싶었다던 셜리가 술집에서 클래식을 연주했다가도 신나서 다른 연주자들과 재즈를 것처럼. 흑인이 입에 댄 컵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던 토니가 흑인을 함부로 말하는 친척에게 정색하고는 그러지 말라며 변한 것처럼. 사람은 칠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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