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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Feb 24. 2024

“낳아줘서”

 가수 윤도현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어린이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전화 연결해 소통하는 코너가 있다. 퇴근길에 종종 듣는데, 이날 주제는 ‘위로’였다.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는 아이가 사연을 보내왔다. 발에 난 티눈을 제거하기 위해 냉동치료를 하기로 했는데, 찾아보니 아프다고 들어 걱정된다는 거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다리가 약하게 태어나 재활 치료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다른 쪽 다리에 무게가 많이 실려 티눈이 생겼다고 했다. 재활 치료는 10년째 다닌다고 한다.  

 외동인 아이에게 외롭지 않냐고 물으니, 엄마랑 마트에 가거나 영화를 보는 게 재밌다고 하고, 엄마에게 전하는 말에서는 “낳아줘서 고맙고, 죄책감 갖지 말라고 전해주고 싶어요”라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들었다. 

 또 나도 모르게 눈에서 물이 나왔는데, 어떤 감정적인 반응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마취 없이 위내시경할 때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처럼 슬픔과 어떤 감정의 동요가 먼저 일어난 것보다 몸의 반응이 더 빨랐던 것 같다.  

 어떤 세척을 위한 참회와 회한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본체만체하고, 내게 주어지지 않은 능력과 재능, 조그만 비운을 탓하고 계획하지 않은 대로 흘러가는 것에 분노했다. 하물며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분개하며 그것들에 돋보기를 비춰가며 부정적인 감정들을 키워왔던 순간들이 흘렀다. 세척액처럼 불쑥 나온 눈물이 그 부정의 장막을 씻겨 드러난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짧은 전화 연결이었지만, 아이는 고마운 것도 많았다. “재활 치료를 계속할 수 있어서 고마워요.”라고 엄마에게 또 고마워했고, 윤도현이 본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흰수염고래라는 노래를 듣고 힘이 나고 있어요. 계속 콘서트 생활 잘 많이 해주세요”라며 고마워했다. 

 라디오에서 20초 넘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 처음 들었다. 중간에 훌쩍이는 소리와 숨을 고르는 소리가 없었다면 방송이 끊어진 걸로 알았을 것이다. 아이다 의아했는지 ‘여보세요?’ 하자 윤도현은 감정을 추스르고 “고맙다. 아저씨가 열심히 할게”라며 화답한다. 

 같이 듣고 있던 누군가도 강아지와 산책하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눈물을 흘렸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낳아줘서 고맙다는 말은 자기 삶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고마움은 자신을 신경 써주고 존중받고 있을 때 드는 감정인데, 삶을 준 주체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는 건 그 삶 속에서 스스로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며, 많은 것이 주어지거나, 억울한 일이 많이 있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대하는 주체의 태도다. 

 어릴 때 언젠가 낳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분명 했던 것 같다. 그 말이 향하는 대상은 표면적으로는 부모님이었겠지만, 그건 나를 둘러싼 세상에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를 있게 한 건 부모님이지만, 그 전에 설명할 수 없는 우주와 삶의 작용이 있었을 것이니. 그 고마움은 매일 피부에 닿는 공기와 먹는 음식, 만나는 사람들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세상에 나와서 고맙고 즐거운 것을 느끼기보다는 억울하고 슬프고 괴로운 일들만 돋보기로 보고 다른 건 못 보고 살았다. 지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고, 지나간 행동에 대해 후회하고, 지금 부족한 것에 대해 서러워한다. 또 다가올 날들을, 영원하지 않을 것에 대해 두려워하기 바빠 삶을 사랑할 여유가 없다. 


 답은 세상과 사람들에 있지 않다. 자기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는 게 답이다.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자신마저도 변하기에 그 변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받아들이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그 답을 가지고 태어났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흐릿해지거나 외면하기 쉽다. 

 오랫동안 제쳐 둔, 정작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에 관한 답. “낳아줘서, 태어나서 고맙다”를 들을 수 있어 고마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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