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비가 제법 왔나 보다. 가림막 역할을 하는 등나무가 있었지만, 그 아래 벤치가 다 젖었다. 아침 운동으로 철봉을 하다가 앉아 숨도 고르고 바람도 쐬던 벤치였다. 물기를 닦을 것도 없었고, 벤치 위에 두고 앉을 만한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은 건 앉지 못해도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앉을 수 없지만 철봉을 하고 등나무 밑에서 서서 숨을 고르고 휴대 전화를 보면서 쉬고 있었다.
그러다 놀이터 주변을 돌면서 걷기 운동을 하시는 한 어르신을 봤다. 보통 서너 분이 같이 계시는데 그날은 그 최고령으로 보이는 어르신 혼자셨다. 어르신은 그날도 비는 그쳤지만, 길은 미끄러울 텐데도 걸음을 보조하는 보행기를 두 손으로 꼭 잡고 나오셨다. 비가 와서 그런지 벌레나 새 울음도 덜했다. 평소보다 고요한 가운데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다. 인기척도 못 느꼈던 터라 누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어르신 눈에 비친 내 눈은 의아한 눈이었을 거다.
어르신이 무어라고 했는데,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잘 듣지 못했다. 이어폰을 빼고, “네?” 되물었다. “앉아” 어르신은 조금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그러면서 보행기를 잡은 한 손을 떼고 벤치 쪽을 가리켰다. 어르신은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조금 더 다가와 벤치 너머 뒤쪽을 가리키며 재차 말했다. “저거 꺼내 앉아.” 어르신이 가리킨 곳엔 어르신 전용 방석이 있었다. 스티로폼 박스 뚜껑을 박스 테이프로 칭칭 감아 만든 방석.
어르신은 평소에도 내가 철봉을 하다가 쉬다가 하는 걸 지켜보았을 거다. 그러다 오늘도 역시 운동하러 나온 나를 보고 있다가, 왜 서 있지 하는 의문을 가졌을 거다. 그러다 벤치가 젖어서 못 앉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할머니가 평소에 깔고 앉던 방석이 떠올랐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어르신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던 건, 마주치기까지 상대를 바라보는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인기척 없이 다가온 어르신의 고개를 들자마자 바로 마주칠 수 있었던 것은 어르신이 나를 먼저 지켜보고 있어서다.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쌍방의 관심을 전제로 한 행위인 것처럼 보여도 엄밀히는 일방적이다. 먼저 눈여겨보고 있는 쪽이 있고, 상대는 그저 한순간만이라도 상대를 바라보아도 눈이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앉고 나중에 올려놔” 어르신은 방석에 더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번 말했다. 어르신은 전부터 생각했을 거다. ‘저 친구는 매일 아침 철봉을 하고 잠시 앉아서 핸드폰을 보면서 쉬네,’ 오늘은 그런 내가 앉아서 쉬고 있지 않으니 젖은 벤치를 보며 생각했을 거다 ‘젖어서 앉아서 못 쉬는구나. 내 방석이 있는데 그걸 알려줘 앉게 해야겠다.’ 하는 생각을 마치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때마침 내가 눈을 마주친 것이다.
마주친다는 건 우연이나 순간보다 기다림과 헤아림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