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소"

by Anand

‘취소’ 익숙한 기계음이 들려왔는데, 그 내용은 익숙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바로 앞에 9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먼저 들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시선을 따로 둘 데가 없어 그 아이가 공동 현관문을 들어가려고 호수와 비밀번호를 치는 걸 물끄러미 보게 되었다. 그 아이는 호수를 누르고 비밀번호를 다 누를 때쯤 옆에 있는 취소를 누르고는 가만히 서 있는다. ‘다 눌러 놓고 왜 취소를 누르는 거지?’


사실 취소 버튼이 있는지도 몰랐다. 급한 성격 탓인지, 아니면 집에 가려는 욕구가 강해서인지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면 손이 빨라져 호수나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게 되면 취소를 누르는 게 아니라 그냥 계속 잘못 쳐서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습니다” 이런 음성을 듣고 다시 누르곤 했다.


그 아이는 잘못 누른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비밀번호를 다 누를 때쯤 공동 현관문 안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고는 ‘취소’를 누르고 그 사람이 나올 때까지 잠시 기다렸던 거다. 나라면 어차피 거의 다 입력했으니, 안에 있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누르고 먼저 들어가거나, 혹은 기다리더라도 ‘취소’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지는 않았을 거다. 이러나저러나 가만히 있어도 문은 열리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취소 버튼을 누르는 아이의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새로움이었다. ‘나라면’이 아니라 이번엔 그 아이의 눈으로 ‘취소’ 버튼을 누르기까지 과정을 생각해 봤다. 먼저 그 아이는 비밀번호를 누르는 데 열중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 안쪽에 사람이 오는 걸 봤겠지. 그리고 그 사람이 나올 것을 생각했고 먼저 내보낼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쓰고 있던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취소 버튼을 눌렀을 거다. 버튼을 누르는 아이의 손동작은 과장을 조금 보태면 조금 우아했고 정갈했다.


버튼을 천천히 하나하나 누르는 아이의 손은 어떻게 보면 서툴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느릿한 동작 탓에, 그 틈에 안에서 오는 사람을 볼 수 있었고, 자기가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단순하고도 당연한 과정이다. 그 당연한 과정이 낯설게 느껴진 건 옳고 그름을 돌아보는 여유 시간을 관성에 익숙해진 동작들로 메우고 과정만 양산할 뿐 끝맺음이나 반성없이 흘려보낸 날들이 그 당연한 과정을 대신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가 누른 ‘취소’는 어떤 낭비나 무위로 돌아가는 소리가 아닌 주위를 살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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