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장소
제주도 동쪽, 섭지코지에 위치한 유민 미술관은 처음부터 유민 미술관이 아니었다. 초기의 이름은 ‘지니어스 로사이’로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가 설계하였다. 중앙일보 선대회장인 고(故) 홍진기 선생께서 이 곳을 매입한 후 유민 미술관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유민 아르누보 컬력션>을 전시하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글라스 하우스’ 역시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작품이다.
2018년 1월, 2주간의 제주도 건축여행을 기획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가 바로 이 곳 ‘유민 미술관’이었다. ‘지니어스 로사이’였을 때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 상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서야 갈 수 있게 되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 중 우리나라에 몇 없는 건물 중 하나인 이 곳은, 안도 다다오의 건축 형식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유민 미술관은 다른 여느 미술관과는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 전체 공간 구성이 중 야외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해서 실내로 들어가기 위해선 꽤 긴 동선을 지나야 한다. 하지만 안도 다다오는 이러한 긴 동선을 그냥 두지 않고 각각의 의미 있는 공간으로 설계해 놓았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아래 사진에 있는 공간이다.
길 양 옆에서 떨어지는 물은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 공간은 미술관을 이루고 있는 공간을 둘러싼 외피인데 이 곳을 그냥 두지 않고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했다. 벽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으로 물이 흐르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폭포와 같았다. 이 길의 끝에는 가로로 긴 창이 하나 있는데, 이 곳에 서서 밖을 바라보면 오른쪽 사진과 같이 성산일출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러한 방법이 우리나라 한옥에서 많이 사용되는 ‘차경’이라 생각했다. 외부의 자연을 하나의 창(혹은 문)을 통해 내부로 끌어들인다는 의미로, 프레임은 항상 같지만 이 곳에 담기는 장면은 시시각각 변화함을 나타낸다.
안도 다다오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가면 항상 볼 수 있는 모습 중 하나이다. 좁은 틈 사이로 스며드는 빛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다행이도 미술관을 관람하는 도중 날씨가 좋아져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좁은 길을 계속해서 따라 걷다면 문득 폐쇄감이 들기 마련인데 그럴때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면 조금 전 성산일출봉이 보였던 거 처럼 이 곳의 새로운 풍경이 보일 것이다. 기다란 ‘건축적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미술관 입구가 나를 맞이하고, 내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건축의 역할은 우리 자신을, 그리고 주변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응시하도록 하는 것
- Ben van Berkel -
제주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알려준 안도 다다오의 건물은 이 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유민 미술관 바로 옆에 있는 글라스 하우스와 또 다른 미술관인 본태 미술관까지. 각각의 건물이 갖는 모습은 전혀 다르지만, 안도 다다오 건축가가 자주 사용하는 재료인 노출 콘크리트와 제주의 모습이 서로 어울려 새로운 장소를 보여준다.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작품들 역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그 곳을 이루는 건물 역시 또 하나의 작품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