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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사서 Dec 26. 2017

의사의 그림일기

김정욱,『병원의 사생활』


                                                                                                                                                                                                                               

                                                                                        

나는 개인적으로 업무일지를 쓴다. 하지만 고작 그날 했던 업무를 '팩트'로 죽 늘어놓는 수준. 내 업무노트의 특징이라면 그날 점심은 누구랑 먹었는가가 적혀있다는 것 정도일 듯하다.(이것을 왜 적기 시작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업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아마도 기록 강박증인 듯..) 내가 한 일을 몇 단어로 나열해 놓는 것이지만 이마저도 안 적어놓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매일 5시 30분에 노트를 펴서 꾸역꾸역 적어 넣고 있다.


업무노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책 역시 그런 '업무노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허나 다른 업무노트와 다른 점이라면, 이 책은 의사인 저자가 일을 하며 느낀 수만 가지의 감정과 고민들이 그가 그린 그림과 함께 녹아있다는 것이다.


제목은 '병원의 사생활'. 저자가 의도한 제목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를 띄어쓰기 없이 읽어보면 '병원의사생활'이 된다. 병원 의사가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틈틈이 기억에 남기고 싶은 장면들을 그림으로 남기고, 거기에 메모를 덧붙인 노트가 책이 되기까지 저자는 신경외과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왔다. 노트에는 자신이 걷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에 대한 고민, 환자와 보호자를 대하는 마음, 초심을 되새기려는 노력 등이 담겨있다. 삶 속의 아주 작은 일로부터도 저자는 반성하고 감사하며, 그 감정들은 자신들의 일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의사는 권위적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잘 안 해주는 말도 걸기 힘든 존재라는 인식이 내 개인적으로는 강했는데, 모든 의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명절에도 병원에 있을 수밖에 없는 환자들과 직원들을 위해 맛있는 초코파이를 선사하는 이런 다정한 의사라면, 기나긴 수술이 끝나면 함께 한 의사 간호사와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다짐하는 이런 리더십 있는 의사라면, 보호자에게 꺼내기 어려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하다 최선의 따뜻한 언어로 말해주려 노력하는 이런 사려 깊은 의사라면, 만약에 나나 우리 가족 중 환자가 생긴다고 해도 결코 힘들어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책들보다 글이 많은 편도 아니고 그림도 있는 책이지만, 간접적으로 내가 의사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 보면서 읽고, 나의 일하는 모습과 겹쳐 생각해 보게 되니 완독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저자의 감정을 관찰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어느 길목에서든지 이런 초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책.



* 남겨두기


"각자가 떠안은 짐은 때론 너무 무거워서 분노, 포기, 짜증과 같은 감정을 함께 실어 나른다. 과연 어디까지가 의사의 몫일까? 나는 그 감정들까지 만지는 게 의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나 보호자가 병원을 하나의 '정비소'쯤으로 여길 때 그 정비소를 병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환자의 짐을 나눠 갖는 의사들이기 때문이다." - 33 p.


"그런데 고개를 떨구고 누워 있는 환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춥고 낯선 수술방에서 겁에 질린 환자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동공에 비친 내 모습이었다. 무표정하게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내 모습. 그 시선에 뜨끔하고 마음을 찔린 까닭은 나의 오래전 경험 때문이었다. 살면서 딱 한 번 받아본 수술. 이동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향하면 눈앞에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병원 복도 천장 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이 낯섦은 두려움과 긴장으로 뒤바뀌어 나를 공격했고 나는 그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었다. 지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이 환자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 75 p.


"어느 날 중환자실 환자의 상태와 예후에 대해 설명하던 중 마주 잡은 보호자의 두 손이 내 눈에 보였다. 원래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연장자에 대한 예우다. 까마득히 어린 내가 저 모인 두 손을 앞에 두고도 황송해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의사이기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 어색한 역전을 결코 당연한 듯 받아들이지 말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공손히 다 해드리자고 다짐했다." - 195 p.


"내겐 한국에서 카센터를 운영하시다 미국으로 이민 간 이모부가 계신다. 나는 그 어른을 꽤나 존경하는데, 그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뒤 자기 전 컴퓨터를 켠다. 그러곤 미국에 있는 자동차 수천 종에 대한 정보를 찾아 공부하신다. 그 일을 매일 밤 한 번도 거르지 않는다. 흔히 자동차 수리 일은 그저 경험만 쌓으면 될 것 같지만, 사실 끊임없는 공부가 요구되는 직업이다. 의사 또한 사람 몸을 고치는 일이기에 평생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 245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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