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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사서 Jan 15. 2020

무대 뒤의 연주가

이종열, 『조율의 시간』





누군가와 의견을 맞출 때 흔히 '조율'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요즘에는 일상생활에서도 이렇게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지만, 예전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았나보다.심지어 음악 분야에서도.


이 책은 '조율'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아주 생소할 때부터 피아노 조율을 스스로 공부한 대한민국 조율 명장의 이야기다. 첫 부분에서 저자는 어떻게 조율의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한 편의 위인전을 읽는 듯 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단소를 만들어 불면서 그 단소의 소리를 길이 등으로 조절해서 음을 달리 하는 기술을 체득하며 자랐다. 또 풍금을 너무 좋아해서 교본 한 권으로 독학을 해 교회의 풍금을 연주하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 풍금의 음색이 이상함을 느끼고 스스로 이렇게 저렇게 만져 보다가, 일본어로 된 조율 관련 책을 혼자 독파해서 멀쩡하게 바꿔놨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애초에 조율사가 될 능력, 천성을 타고난 듯 보였다.


이 명장은 우리나라의 큰 무대들의 피아노 조율을 담당하면서 세계의 능력있는 피아니스트들을 많이 만났다. 그가 만났던 연주가들과의 에피소드들도 간단히 적혀 있는데, 그 속에서 그의 '애국심'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조율 실력이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것, 자신의 조율이 대한민국 예술의 얼굴임을 계속해서 잊지 않고 스스로 상기시키는 모습이 느껴졌다.


명성 있는 피아니스트들과의 에피소드를 읽으면서는 까다로운 피아니스트들은 직접 조율도 한다는 걸 새롭게 알았다. 나는 조율은 그냥 정해져 있는 방법이 있어서 만국 공통의 어떤 기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조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음색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거세지기도 한다고 한다. 음향도 생각을 해야 하고, 연주할 곡과 작곡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율에 이렇게나 신경쓸 것들이 많은지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나 까다로운 연주자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한 연주를 위해 길게는 3일까지도 내내 붙잡고 있을 때도 있다고 하니.. 중노동이 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까다로운 연주자들을 만족시킨 이야기에서는 명장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80이 넘은 요즘도 그는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조율가도 무대 뒤의 연주가라는 생각으로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라디오나 음반을 듣다가도 좋은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그와 같은 소리를 내기 위해 계속 연구한다. 나는 대한민국 1호 조율명장이다.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최고의 피아노를 선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언젠가는 이 자리를 물러나야 하니 뒷사람이 나보다 더 나아야지 못하지는 않아야 할 텐데 하는 노파심이 앞선다. 이 자리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만나는 자리이므로 조율도 세계적인 수준이 아니면 국제 망신을 당하게 된다." - 291 p.



* 남겨두기


"조율에 입문한 뒤로 나는 이왕 하는 일이면 우리나라 최고의 조율사가 되기를 목표로 노력했다. 그러나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을 만나면서 세계적 수준의 조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한층 더 스스로를 갈고닦았다." - 5 p.


"세계적인 연주자가 왔을 때 그 사람이 흡족할 만큼 악기를 만들어 낼 능력을 가져야 한다. 나한테 언제 어떤 일이 주어질지 모르니 미리 대비해야 되는 것이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유비무환을 강조한다. 지금은 꼬마들이 치는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지만, 언제 어떤 중요한 일이 갑자기 주어질지 모르니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 72 p.


"요즘은 영국 사람이 쓴 『피아노 제작 기술』이라는 책을 세 번째 읽고 있는 중이다. 이제 겨우 기술이 쓸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벌써 80세가 되었다. 학문은 끝이 없다는 말이 맞는 말임을 깨닫는다." - 246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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