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진, 『모네는 런던의 겨울을 좋아했다는데』
평생 일을 하다가 1년 동안 합법적으로(?) 잠깐 쉬는 기분이란 어떨까? 나도 지금 (육아)휴직 중이긴 하지만 지금 회사에서 내리 일한 5년 동안 한 번쯤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달 만이라도 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저자는 JTBC 기자로 일하면서 1년이라는 해외연수의 기회를 얻고 런던에서 생활했다. 그때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1년을 꽉 채우자는 생각으로 임했고, 이 책은 그런 그녀의 기록이다.
저자가 미술작품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은 그림을 바탕으로 서술된다. 나는 그림 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이렇게 일상생활에 녹아든 그림을 일상의 이야기와 함께 펼치니 흥미로웠다. 그림도 삶에 이런 의미를 주는구나, 이런 설명의 그림이라면 나도 내 방에 걸어놔도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만들었다. 그림을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읽는 내내 생각했던 건, 만약 내가 연수를 간다면, 나는 그림 대신 음악에 푹 빠졌을 것 같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로 가고 싶군.. 읏흠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으로 가득 채운 1년의 자유로운 연수 생활. 책은 아이를 키우며 집 안에 박혀있는 나에게 대리만족을 주었다. 본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집순이 of 집순이라서 외국에 나가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그것보다 나에게 대리만족을 주었던 건,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모으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체험하고 싶은 것들을 원 없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렸고, 또 그걸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
만약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는 1년은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다. 나는 아마 책, 또 책, 그리고 책, 가끔 음악.. 이지 않을까.
* 남겨두기
"그림은 내 전공 분야나 하는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주로 정치부나 사회부에 소속된 기자였다. 문화·예술과 관련된 취재라면 문화부 장관 하마평이나 대통령 해외순방 행사 정도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 전공이나 일이 그림과는 전혀 무관했기 때문에 마냥 그림을 좋아한 것이다. 그림 에세이를 읽고 화집을 보고 전시회를 가는 것은 모두 내가 힘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을 쉬게 하는 방법이었다. 잘 몰라도 되고, 잘하지 못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영역이었다.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순수한 관심사가 있다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고,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 98 p.
"나는 책을 '추억의 사진'으로 여긴다. 책을 산 날의 관심과 목적, 기분이 내가 구입한 책에 오롯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예를 들어 2019년 3월의 어느 날, 런던의 브릭레인 서점에서 구입한 책들의 제목을 죽 살펴보면 그즈음 내가 런던과 영어, 파리와 그림, 행복 등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사는 행위를 통해 나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발견하게 된다. 혹시라도 비용을 따지거나 '언제 다 읽겠어?' 하는 마음으로 책을 사지 않고 그냥 서점을 나온다면 그날의 관심을 기록하거나 추억을 남기는 일과도 영영 이별하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내게는 책을 읽는 것 이상으로 책을 사는 행위가 중요하다. 한아름 사들고 온 책을 쌓아두고 종일 여유를 부리며 이 책 저 책을 읽는 행복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 247 p.
"책이라면 얼마든지 더 많이 갖고 싶다. 내가 고른 책은 나의 욕망이고, 책을 사는 건 그 욕망을 사는 일이며, 구입한 책을 읽어내는 건 욕망을 실현하는 일이다. 설령 현실이 미처 욕망을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꿈꾸는 일마저 거두고 싶진 않다. 그래서 나는 언제 어디서나 계속 책을 산다." - 250 p.
"어릴 때부터 닮고 싶은 누군가를 늘 동경했던 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닮고 싶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됐다. 다른 사람을 닮고 싶어 하는 건 욕망하는 일이지만, 누군가가 나를 닮고 싶어 한다면 그건 아마도 성공의 결과일 것이기 때문이다." - 320 p.
"중요한 건 우리 삶이 기사보다는 문학에 가깝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문학이 감동을 주기 어렵듯 감정을 전달하고 표현하는 일에 서툰 삶도 풍요롭기 어렵다." - 340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