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사서 Feb 02. 2016

'이성 없는 짐승'의 최후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1950년대에 지어진 소설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현 시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생각할 거리도 많은 책이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어둡고 스산해서 보기 힘든 책일 줄 알았는데 한없이 밝고 자연친화적(?)인 소녀 클라리세 덕분에 이 책이 던져줄 메시지를 대략 느끼게 되어 계속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이 불법이고, 책이란 책은 모두 불태워서 사람들이 읽을 수 없도록 하는 나라가 이 소설의 배경이다. 그 중심에 성실한 방화수 주인공이 있다. 책을 보유하고 있는 집은 통째로 태워버린다. 뭔가를 읽을 수 없도록 하는 환경에 있다보니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은 3면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텔레비전, 귀마개 라디오 뿐이다. 그 속에서 그들은 깊은 생각을 할 권리를 잃고 말초적 쾌락만 즐길 뿐이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진짜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던 주인공은 클라리세라는, 이 나라에서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는, 생각이 깊고 호기심많은 소녀를 만나게 된다. 자연을 살피고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 그녀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이 변하고, 알지 못하던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또한 태워지는 책과 함께 담담하게 죽어갔던 한 여인을 보면서 그의 양심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간밤에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어. 그리고 불태운 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 쪽 한 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 


책 속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는 주인공. 책을 읽으려고 해도 단 한 글자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지하철 치약 광고의 반복적인 시끄러움. 주인공이 느꼈던 분노는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서 느끼던 그것과 99% 일치하는 것이리라.  


잔인하고 텁텁한 그 곳에서 주인공은 마치 요단강을 건너듯 강을 건너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하고, 강 건너 자신이 살던 곳에 일어난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 부분에서 『천로역정』이 생각났다.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를 버리고 천국으로 가는 길을 걸었던 것처럼, 주인공 몬태그도 자신이 살던 그 비인간적인 곳을 비슷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사랑은 메마르고, 생각도 메마르고, 옳고 그른 것의 경계도 희미해지고, 깊고 심오한 것을 멀리하는 오늘날의 모습. 그것이 보였다. 생각이 없이 무의미하게 죽음을 향해 떠내려가는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최후. 그것이 보였다.   




* 남겨두기 


"바로 지금 그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예전의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는 것이다." 


"사람들한테 해석이 필요 없는 정보를 잔뜩 집어넣거나 속이 꽉 찼다고 느끼도록 '사실'들을 주입시켜야 돼. 새로 얻은 정보 때문에 '훌륭해'졌다고 느끼도록 말이야.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움직이지 않고도 운동감을 느끼게 될 테지. 그리고 행복해지는 거야. 그렇게 주입된 '사실'들은 변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돼. 그런 것들은 우울한 생각만 낳을 뿐이야." - 102-103 p. 


"하지만 책을 읽으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캄캄한 동굴 같은 신세를 좀 벗어날지도 몰라. 너나없이 똑같이 이런 광기 어린 삶을 살아가는 운명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지도 몰라. 난 저 벽면에서 밤낮없이 떠들고 노는 바보 같은 자식들 얘기는 듣지 않겠어. 제발 밀리, 모르겠어? 하루 한 시간씩만, 하루 두 시간씩만 이 책들을 읽으면, 어쩌면......" - 121 p. 


"우리가 필요한 건 뭐든지 있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세상인데 우린 행복하지 않아요. 뭔가가 빠져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단 한 가지는 그 동안에 사라진 거라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가 불태워 없앤 책들,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에 뭔가 해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135 p.  


그리고 아래는 작가의 '마치는 글' 중에서. 

"세상은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다, 우리가 그런 소수자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다 보면 더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난쟁이나 거인, 오랑우탄이나 돌고래, 핵탄두 혹은 수자원 보존주의자, 컴퓨터 옹호주의자 혹은 네오 러다이트, 바보 혹은 현인 등등 모두가 자기들만의 미학적 잣대로 개입하려 들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상은 그 모든 그룹들 각각이 나름의 주장을 내세우며 법을 만들기도 하고 폐기시키기도 하는 일종의 운동장이다. 하지만 내 소설은, 희곡은, 시는, 그들의 권리가 끝나고 나의 지배 명령이 시작되어 행사되는 통치령이다. 몰몬교도들이 나의 희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 쓰라고 하라. 아일랜드인들이 내 더블린 이야기를 싫어한다면 타이프라이터를 줘 버려라."

매거진의 이전글 궁금한 음악가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