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연,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라디오 프로듀서. 나의 지금 직업을 희망하기 바로 직전까지 꿈꾸던 일이다. 시작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미국에서 오신 고모가 파나소닉 워크맨을 내 선물로 사 오셨다. 이리저리 움직여보다 라디오 버튼을 누르게 되었고, 곧이어 라디오는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 어린 나이부터 대중음악 애호가였던 나는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게 좋았고, 좋아하던 배우가 DJ를 하는 때면 매일같이 밤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여기저기 주파수를 옮겨다니며 이 시간은 이 프로그램, 저 시간은 저 프로그램 하며 3사의 편성표를 줄줄 외웠다. 그 이후로 나도 라디오를 진행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라디오 진행자들은 대부분 연예인이거나 방송사 아나운서였다. 나는 그 꿈을 포기하고 라디오와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일할 수 있는 프로듀서를 꿈꾸기 시작했다.
내가 MBC 라디오 프로듀서로 입사하고 싶다고 설치던 2008년, 이 분이 그 곳으로 입사했다. 책을 읽는 내내 라디오가 얼마나 따스한 매체였던가, 잊고 있었던 그 매력을 다시 꺼내 느껴볼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책장이 잘 안 넘어갔다. 어려운 책이 아닌데도 그랬던 건 아마, 잊었던 나의 꿈과 그 시절의 나의 바람들, 내가 기울였던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노력들이 생각나 마음이 자주 먹먹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꼭 내 꿈을 완벽하게 이뤄낸 사람의 이야기를 읽게 되다니.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귀여운 시기질투가 나면서도 내 감정은 결국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동질감에 멈췄다. 내가 느꼈던 라디오에 대한 애정, 아니 이 분은 더 오랜 시간을 가까이서 겪어 오셨으니 더 달달하게 느껴 온 애정을 보여주는데 마치 우리 둘 다 친하게 지내고 있는 어떤 제3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라디오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는 순간들은 이심전심의 순간들이었다.
"라디오라는 매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은 결국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누구도 인터넷에 서운해한다거나 케이블티브이를 그리워하지는 않는데 유독 라디오는 마치 사람이라도 되는 양 감정을 품는다. 매일 함께해서, 일상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아서, 마음을 나눠서,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어서. 우정처럼, 시간처럼, 삶처럼." - 67 p.
직업으로서의 라디오 프로듀서를 이야기할 때는 지금 나의 직업에 대해 생각할 때와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것 같아서 그것조차도 반가웠다. 밖에서 봤을 때는 뭔가 있어 보이는 일, 뭔가 내용이 실할 것 같은 직업이지만 실제로는 너무 뭐가 없어서 그 사실을 감추려 한다는 내용을 봤을 때 내가 했던 고민들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사람들의 일이란 다 그런 걸까. 또 라디오 청취율이 계속 하락하고 있고, 다른 매체들이 많이 생겨서 라디오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다는 고민에도 나의 고민이 덧붙여질 수 있었다. 책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고, 유튜브같은 다른 더 재밌고 유익한 매체들이 많이 있는데 누가 이제 책을 볼까 하는 고민들, 도서관의 이용률이 낮아지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도서관의 갈 길은 어디인지 하는 고민들. 라디오 프로듀서와 사서, 어딘가 모르게 좀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라디오를 생각하면 늘 마음 한 켠이 아련한데, 이 책을 읽음으로 마음이 좀 풀어진 기분이었다. 내가 끝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룬 사람도 결국에는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구나. 세상 모든 일들은 다 그런 거구나. 그렇지만 이 책 제목처럼 좋아서 선택한 나의 일이 지겨움을 줄지라도, 결국 그 대상을 사랑하면 이 정도의 큰 애정은 계속 간직하며 일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과도 같은 내 라디오를 잘 부탁합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주세요! 좋은 노래도 끊임없이 많이 틀어주세요!
(은행나무 출판사의 라이킷 시리즈 중 처음 읽은 책이었는데, 다양한 직업인들의 일 이야기, 그 속에서 고민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낸다고 한다. 만약 나의 직업을 이런 식으로 적어 본다면 어떤 걸 말할 수 있을까, 괜시리 고민하게 되기도 했다. 이런 시리즈 정말 좋은 것 같다. 앞으로 유심히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