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는 그보다 중요한 게 훨씬 많아.
"엄마~ 나 내일은 새벽 6시 반에 나가야 해. 친구들이랑 안무연습실에서 7시에 만나기로 했어"
"주말인데 그렇게 일찍 만나야 해?"
"응. 애들이 9시에서 10시쯤에는 다 학원 가야 해서 그때밖에 시간이 없대"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수련회 장기자랑 준비로 바쁜 웬디다. 시험이 끝나면 밥도 안 먹고 잠만 자겠다고 선포했던 아이가 주말에도 새벽에 나가기 바쁘다. 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춤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며 캘리는 참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캘리는 학창 시절 무대에 나가 장기자랑을 해본 적도 없고,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잠도 안 자고 연습을 하는 웬디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수련회는 시험이 끝나고 5일 뒤에 예정되어 있어서 친구들과 모여서 연습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주말에는 친구들이 대부분 학원스케줄이 있으니 시간 맞추기도 어려웠나 보다.
장기자랑 무대는 8명이 나가기로 했단다.
최소 2시간은 연습하기로 했을 때, 8명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시간을 정하다 보니 일요일 아침 7시와 월요일 아침 6시로 결정된 것이다.
웬디는 아침잠이 특히 많은데, 정말 6시에 일어나 대충 씻고 옷 걸쳐 입더니 밥도 안 먹고 6시 반에 나갔다.
“다들 대단하네~ 그래도 친구들하고 이런 거 연습하고 놀 때가 좋을 때야. 잘 다녀와~”
웬디는 피곤함도 잊은 채 “다녀올게요~”하고 발랄하게 집을 나섰다.
한 3시간이 지났을까.
오전 10시 조금 넘어서 웬디가 돌아왔다.
친구들과 실컷 춤연습하고 기분이 업되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오자마자 기운이 쭉 빠진 모습이다.
"연습 잘했어?"
"응.. 연습을 하긴 했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애들이 안무도 안 외워와서 지금 좀 심각해. 그런데 그것보다 더 속상한 게 뭔지 알아? 아침에 7시까지 시간 맞춰서 온 애가 나밖에 없었어. 그나마 빨리 온 애가 10분쯤 도착하고 다른 애들은 거의 30분 넘어서 오고, 8시 다 돼서 온 애도 있었어. 나는 뭐 잠이 없어서 그렇게 빨리 간 건가. 약속했으니까 지키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근데 다들 핑계만 대더라고. 늦게 일어났다고 하고, 버스가 막혔다고 하고, 나오다가 엄마랑 싸웠다는 애도 있고, 늦었는데 밥 먹고 온 애도 있다니깐"
웬디는 주말인데도 그 시간만 된다는 친구들에게 맞추려고 밥도 안 먹고 옷도 대충 입고 나갔는데, 정작 친구들이 모두 늦게 왔으니 너무 속상했나 보다. 게다가 아예 오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웬디가 더 속상했던 건 늦게 온 친구들이 미안하다는 사과는 없고 본인들이 늦은 이유에 대한 변명만 계속 늘어놨다는 것이었단다. 오히려 10분 정도 늦은 두 번째로 도착한 친구만 정말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웬디는 친구들 앞에서 서운한 내색은 못했다며 이렇게 집에 와서 감정을 쏟아냈다.
"잘했어. 다른 거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엄마는 이렇게 약속을 잘 지킨 웬디가 최고인 거 같아"
그다음 날 월요일에는 6시에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웬디는 5시 반에 집을 나섰다.
예상은 했지만, 그날도 6시까지 온 친구는 웬디밖에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냥 평소 등교시간대로 수업시간 맞춰 온 친구도 있었다고...
아이러니한 건 그 시간을 정한 건 웬디가 아니라, 그 시간을 전혀 지키지 않은 4-5명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시간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특히 약속시간에 조금이라도 늦는 건 상대방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일이므로 미리 가서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얘기해 왔다.
“너희가 지금은 시간을 잘 지키고,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어떤 큰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를 수도 있어. 하지만 이 습관은 너희가 성인이 되었을 때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거야. 이건 신뢰의 문제거든.
너희도 생각해 봐. 아무리 작은 약속이라도 꼭 지키는 친구들과 매번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친구가 있다면 어떤 친구를 더 믿을 수 있겠어?"
“아~ 맞아. 약속 지키는 거 보면 친구들이 달라 보이긴 해"
캘리는 주변에 사업이나 개인적인 역량으로 성공하신 분들을 관찰해 보며 느낀 점이 있었다. 그분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캘리 자신도 부모님으로부터 시간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고 배워왔다. 캘리와 폴은 이런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습관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을 키워왔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8명 중에 시간약속을 제대로 지킨 사람이 웬디 한 명뿐이었다는 사실이 웬디도 그렇고 캘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웬디가 중2였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친구들과 찍은 영상과 사진을 편집하여 브이로그를 만드는 활동이 있었다. 그렇게 제출한 브이로그 중 우수작품을 뽑아서 문화상품권을 증정해 준다고 했다. 모둠 활동이라서 웬디가 속한 모둠의 아이들은 각자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브이로그에 쓸 사진을 모아서 정리하는 친구, 영상만 모아서 정리하는 친구, 자막 넣는 친구, 그리고 그 자료를 모아서 스토리를 구성하고 기획해서 음악을 넣고 전체를 편집하는 친구. 이렇게 역할을 나눴는데 평소 영상편집을 취미로 많이 했던 웬디가 전체편집을 하는 게 좋겠다는 친구들의 추천이 있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자기도 편집 잘한다며 본인이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전체편집을 맡겨놨는데, 이후 수행평가가 많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더란다.
결국 제출날짜가 다가왔고 그날은 마침 중요한 수행평가가 있던 날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녁 10시쯤에 그 친구한테 개인톡이 왔다. 자기가 사실 편집을 하나도 못해서 이제 하려고 하는데, 엄마한테 혼났다고. 점수에 들어가지도 않는 그걸 왜 하고 있냐고, 수행평가 준비나 하라고 엄청 혼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웬디한테 '그냥 네가 해라'라고 했던 것. 제출일 전날 저녁 10시에 말이다.
웬디는 넘길 거면 진작 넘기지 왜 전날 포기하는지 모르겠다며, 그날 수행평가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영상편집을 하다가 새벽에 잠들었다. 그걸 지켜보는 캘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너의 책임도 아닌데, 그걸 왜 웬디 네가 하고 있냐고. 팀원들한테 솔직히 말하고 너도 시간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해라'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나까지 안 하면 우리 팀 과제는 망한다"며 끝까지 붙들고 있는 웬디를 보니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 과제는 결국 웬디가 최종 완성한 영상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웬디의 수행평가는...;;
얻은 게 있으니 잃은 것도 있는 법이다.
점수에 들어가는 활동이나 공부만 골라서 하고, 그렇지 않은 활동이나 약속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없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아이들의 생각일까? 부모들의 생각일까?
그리고 이 기본적인 '약속 지키기'를 소홀히 여기고 산다면, 살면서 좋은 기회를 놓치고 혹은 어떤 중요한 실수를 하게 될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무리 공부만(?) 잘해도 결국 우리 아이들은 사회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점수 위주의 삶이 전략적일 수는 있어도 길게 본다면 이러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좋은 기회와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