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뮤지컬에 한을 품으면
사실 내가 런던에 8박 9일이라는 긴 일정을 잡은 이유는 뮤지컬 때문이다. 뉴욕에서 '라이온 킹' 단 한 편만 봤다는 게 너무나도 한이 되어서 런던에서 뮤지컬을 제대로 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매일 저녁 런던의 모든 극장에서 뮤지컬이 펼쳐지지만, 뮤지컬 좌석은 엄청 비싸다. 그나마 배우들의 얼굴이 보이 는 1층 자리는 적어도 최소 100파운드(15만 원)부터 시작하며 중 앙에 가깝고 앞으로 갈수록 비싸진다. 하지만, 나 같은 가난한 여 행객을 위해 평일 아침 일찍 극장에 줄을 서면, 약 10파운드 정도 의 가격에 맨 앞 좌석이나, 저렴한 좌석을 얻을 수 있는 데이 시트 (Day Seat) 라는 제도가 있다.
- 1일 1식
그래도 여전히 비싼 뮤지컬 값은 나에게 여전히 부담이었고 나 는 뮤지컬을 위해 여행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행 비를 포기하는 대신 나는 '밥을 굶었다'. 영국 슈퍼마켓에는 meal deal이라고 해서 샌드위치+과자+음료 조합을 3파운드에 파는 행사를 한다. 하루에 밀딜 하나 먹고 배고프면 마트에서 할 인 하는 미지근한 콜라를 1.5L씩 마셔셔 배를 채웠다. 식당에서 딱 한 번 식사를 했고 친구가 있을 때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 다. 비가 와서 공원 벤치에 앉을 수 없자 그냥 우산을 들고 걸어 가며 먹기도 했다. 이렇게 절약한 덕분에 6편이나 되는 뮤지컬을 볼 수 있었다.
- 킹키부츠
처음 본 뮤지컬은 킹키부츠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뮤지컬이지 만, 줄거리나 내용은 전혀 몰랐고 보려고 했던 뮤지컬도 아니다. 비행기 연착으로 허무하게 첼시 스탠퍼드 구장 투어를 날리고 피 곤함으로 아무렇게나 런던 거리를 떠돌며 트라팔가 광장 근처에 서 영국을 맛보고 있을 때, 반짝이로 휘황찬란한 극장이 눈에 들 어왔다. 킹키부츠 극장이었다. 이제 곧 뮤지컬이 시작하기 직전이 였지만, 1층 맨 뒷 자리가 20파운드나 했다. 처음에는 안 보려고 했지만, 허무하게 시간을 날릴 수 없어 보기로 결정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빨간색 여장 남자가 나와서 매우 당황했다. 하 지만 곧 '드래그퀸 로라'의 매력에 빠져들어 즐기기 시작했다. 영 국식 영어에 익숙해지기 전이라 가사가 잘 들리지도 않았고, 1층 맨 뒷자리에 않아서 사람들 머리 사이로 로라를 바라보았을 뿐이 지만, 영국에서 처음보는 뮤지컬에 혼자 신나서 방방 뛰었다
번째로 본 뮤지컬은 알라딘이다. 이미 뉴욕에서 라이온 킹을 봤기 때문에, 디즈니의 뮤지컬에 친숙해서 선택했다. 아침에 3등 으로 줄을 서면서, 딸을 위해 티켓을 사러 온 레게머리에 문신이 가득한 영국인과 이집트 대사관에서 일하시는 외교부 직원을 만 났다. 셋이서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티켓을 샀다. 오후 2시 반 공연 전까지 근처 내셔널 갤러리에서 시간을 때우고 뮤지컬을 봤다. 그런데 재스민이나 알라딘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지니 혼자의 원맨쇼로 모든 객석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배역 단 한 사람이 주 는 무게감과 무대 장악력은 뮤지컬이 진행되는 2시간 내내 유지 되었고 알라딘과 쟈스민만 나오면 지니는 도대체 언제 나오나 기다렸다. 공연 후 같이 줄을 서서 본 사람과 차이나 타운에서 음식 을 포장해 서 오랜만에 햇살이 좋은 트라팔가 광장에서 피크닉을 즐겼다.
세 번째는 사실상 뮤지컬을 보기 위해 런던에 온 이유 자체인 ' 레 미제라블'이다. 알라딘을 본 이후 7시 공연이었다. 가장 기대 했던 뮤지컬인만큼 은 좋은 자리로 보고 싶었고 데이 시트 제도 가 없어서 거금을 들여 인터넷으로 예매했다. 영화와 같은 화려함 과 대규모의 웅장함은 없었지만, 세트장의 빙글빙글 회전해가면 서 사람들이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나 도망치는 통로 같은 세세하 고 다양한 배경들을 표현하며 세밀함을 더했다. 게다가 라이브로 듣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은 영화와 비교 할 수 없었 다. 후반부에는 혼자 감격에 차고 눈물을 흘려서 뮤지컬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최고의 뮤지컬을 보고 나니, 영 국 여행에 좀 더 여유가 생겼다.
- 위키드
네 번째는 도로시의 재해석인 초록색 서쪽 마녀가 주인공 나오 는 '위키드'다. 극장이 숙소 근처에 있어서 발 빠르게 데이 시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줄을 서며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왔던 독일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아직 몇 가지 한국어 인사말과 소 맥, 술 게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라이온킹을 나는 레 미 제라블을 최고의 뮤지컬로 뽑으며 서로 옥신각신 했고,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금세 줄이 줄어들었다. 일찍 줄 선 덕택에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맨 앞자리는 최고였다. 단상 덕택에 조금 올 려다봐야 하지만, 배우가 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면서 노래를 했 고 눈가 주름 때문에 마녀의 초록색 분장이 조금 떨어지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무대에서 중력을 거스르고 노래를 부르며 하늘을 날아오르는 장면에서는 왜 한국에서 공연할 때마다 지하철 광고 판이 초록색으로 도배되는지 알 수 있었다.
- 마틸다
다섯 번째 뮤지컬은 '마틸다'이다. 영화를 재밌게 보기도 했고 이 날에 하는 뮤지컬이 마틸다 밖에 없어서 선택했다. 데이 시트 티 켓가격이 달랑 5파운드였다. 매우 싼 가격에 큰 고민을 하지 않고 보았는데 곧 싼 가격의 이유를 알게 된다. 3층 맨 구석 자리는 인생에서 가장 최악이었다. 계단이 너무 가팔라서 앞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고 가뜩이나 작은 아이들은 점보다 작게 보였으며, 아이들의 혀 짧은 발음과 소리에 음향이 뭉개져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잘 보 이지 않는 건 싼 좌석이니 백번 이해하지만 잘 들리지 않을 줄은 예 상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다 보니 춤과 몸짓도 범위가 한정적이라 그랬다. 2시간 동안 관람이 아니라 버티다가 나왔다는 게 맞다.
- 맘마미아
여섯 번째는 ABBA의 노래로 유명한 맘마미아이다. 데이 시트 가 없었고 친구 표 까지 사느라 맨 앞자리 티켓을 조금 비싸게 샀 다. 친구가 예정에도 없는 비싼 돈을 쓰게 되었다고 나를 비난했 지만, 뮤지컬을 보고 난 뒤로 생각이 달라져서 극찬하였다. 다양 한 연령대가 혼재하거나 젊은 사람들이 주로 관람하는 지금까 지 의 뮤지컬과는 다르게 나이 지긋하신 관객분들이 많았다. 아마도 아바의 노래가 유명하던 7~80년대에 청춘을 사신 분들로 추측된 다. 뮤지컬 내내 노래를 조그마하게 따라 부르고 어깨가 들썩 들 썩 거리는 할머니들과 빨래판 복근의 남자 배우들과 야한 농담에 자지러지는 아줌마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맨 앞자 리 에서 소피 역을 맡은 배우들의 그리스의 바다 같은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 눈동자 속에서 춤을 추고 싶었다. 마지막 커튼콜 에 는 모두 다 일어나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고 그렇게 배고팠던 내 런던 뮤지컬 투어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