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감옥, 악몽의 자유
소년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 빛에는 담기지 않을 냉기를 생각했다. 겨울의 햇빛은 그렇게 유약하고 얇았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이 계절의 햇빛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이런 계절이 되면 밤새도록 들려오는 어머니의 기침 소리가 더 짙어지는 듯했다. 희미한 햇빛이 들어오는 아침이 찾아오면 그 기침은 아침 공기와 함께 식어갔다. 소년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는 무겁고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들어 올렸다. 다리를 어기적거리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소년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 집안이 서서히 동력을 잃어갔다.
부엌에서 작은 발소리가 울리고 머그컵과 식기가 부딪혀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동생이 우유컵을 꺼내다 떨어뜨릴까 소년은 조마조마한 마음에 얼른 부엌으로 나갔다. 소년이 먼저 배우게 된 보호본능은 이런 것들이었다. 유리컵 따위가 동생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 산산이 부서지는 것, 총총거리는 발걸음이 엉켜 넘어지는 바람에 아직은 이 집의 푸석함을 닮지 않은 동생의 고운 뺨에 생채기가 나는 것, 그리고 엄마가 누워있는 이유와, 형의 고군분투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수한 아이가 크리스마스의 거짓을 알게 되는 것 말이다.
“형, 눈 언제 와? 크리스마스에 눈 올까?”
소년은 다시 창문 밖을 보았다. 동생은 눈을 보면 늘 그렇게 기뻐했다. 아직 눈이 내리지 않은 겨울, 파랗던 가을 하늘이 뿌연 흰색으로 변해있었다. 이런 하늘은 소년에겐 희미함을 선사했다. 눈이 내려도 소년은 한결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다. 오늘 저녁도 편의점을 지키고 있자면, 꺄르륵 거리며 친구들과 컵라면을 먹는 또래 아이들이 스쳐갈 것이다. 눈은 차갑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에게는 세상의 모든 축복처럼 내리는 것 같았다. 소년은 동생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티 나지 않을 정도의 웃음으로 동생에게 화답했다. 어머니의 방에서는 다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다시 얼굴 표정을 재정비했다. 괜찮은 얼굴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방문을 살짝 열고 동생에게 손짓했다.
“감기 걸린다. 이리 와.”
기침은 어젯밤보다 조금 더 깊어져 있는 듯했다. 어머니의 기침 소리 하나, 호흡 하나가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소년은 그런 벽돌을 제 어깨에 짊어질 줄 알았다.
날짜는 12월 중순을 지나고 있었다. 거리엔 조금씩 반짝이는 조명과 눈사람 모형들, 여러 장신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에겐 달갑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일일 아르바이트나 다니고 있는 아르바이트의 연장근무 등의 이점은 있었다. 돈을 더 벌 수 있었다. 동생은 며칠 전부터 산타 이야기를 끊임없이 꺼냈다. 누워있는 어머니로 인해 홀로가 아닌 홀로 집을 지켜야 하는 동생은 TV와 친했다. 그런 TV 광고에서 본 장난감이 얼마나 갖고 싶은지, 산타에게 편지를 쓸 테니 소년에게 검사를 해달라며 웃었다. 이런 동생의 편지는 소년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소년은 동생의 산타가 되어줄 수밖에 없었다. 현실 속의 산타는 동생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독심술이 없었고 미리 선물의 가격을 가늠하지 않으면 몇 시간을 더 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년에게 크리스마스는 퍽 불쾌한 계절이었다. 동생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기도 했고 지켜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 상충되는 마음이 괴리가 불쾌했다. 동생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원하는 선물은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저 동심이 깨진다면 소년의 고생이 조금은 덜어질 수 있는지'를 매년 떠올렸다. 그 동심을 지켜볼 때마다 자신의 어깨에 더해질 짐의 무게가 선명해지는 듯했다. 선물을 살 돈이 없었다. 어머니의 약값과 난방비와 식비도 겨우 감당하는 것이 소년의 주머니 사정이었다. 언젠가 동생이 크리스마스의 거짓을 알게 된다면 좀 더 홀가분해질 것 같았다. 불쾌한 홀가분함을 상상하며 소년은 매년 겨울을 보냈다. 집에 남은 건 동생을 위한 빈 선물상자와 몇 천 원 남짓의 동전뿐이었다.
등교를 위해 아침에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순간, 소년은 잠시 자신이 서 있는 바닥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어제도 느꼈던 겨울의 햇빛은 얇았고, 방안에서도 느껴지던 이 계절의 공기가 뼛속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집 안이던 밖이던 익숙했던 그 공기보다는 자신이 흔들리던 순간 느껴졌던 찰나의 고요함이었다. 동생이 분명 뒤에서 인사를 하였음에도 소년은 명확한 문장을 인식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기침소리만 멀리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울렸다. 순간적으로 자기 혼자 세상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 미세한 기시감은 소년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낯설었다. 간밤에 꿨던 또다시 찾아온 기분 나쁜 악몽이 떠올랐다. 차가운 계절이 다가오면 반복되는 그 꿈.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집안일을 하고 나면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매일의 일상을 견뎌내는 소년은 한 번의 깜빡임으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어둑한 소년의 잠은 어두워질수록 짧게 느껴졌다. 그런 소년에게 꿈이란 것은, 이런 일상을 보내게 된 이후부터는 좀처럼 겪어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만큼 소년에겐 짧은 잠이었기에 꿈을 꿀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꿈속에서 소년은 안개 깊은 숲을 달리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허리높이까지 기이하게 내려와 그를 스치고, 축축한 흙냄새가 코끝을 채웠다. 장소만 다를 뿐 매년 꿈속에서 그를 쫓아오는 괴물은 형체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무언가였다. 형체 없는 괴물은 그러나 분명히 무거운 존재였고 소년의 거친 호흡을 짓눌렀다. 소년은 매년 겨울 그 괴물에게 쫓기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쏟아냈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뱉지 못한 울음이었다. 숨도, 목소리도 마음대로 펑펑 터져 나왔다. 숲 속에서 소년의 울음은 퍼져나갔고 괴물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만 반복할 뿐 계속해서 소년을 따라왔다.
이러한 꿈에서 깨어나면 소년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처음엔 식은땀을 흘리며 발작하듯 잠자리에서 깨어났지만 비록 악몽이라도 평소와는 달리 기나긴 잠을 잔 것만 같아 꿈을 꾼다는 사실 자체가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지난 수년 동안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이 꿈에서만큼은 소년이 '울 수 있다'는 사실이 소년 자신마저 놀라게 했다. 울음으로 도망치는, 기묘한 해방의 꿈.
그에 반해 소년은 현실세계에서 거짓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손님에게 웃는 얼굴을 내보여야 했다. 손님으로 같은 나이또래의 학생들이 서로 장난을 치며 오기라도 하면 자신의 비참한 표정을 숨겨야 했다. 집에 와서는 죄 없는 어머니를 원망하는 일을 숨겨야 했다. 아픔에는 죄가 없었다. 동생의 순수함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항상 들뜬 어조로 웃으며 말상대를 해주어야 했다. 그런 소년은 꿈속에서 울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 반복되던 악몽이 흐릿했다. 다시 시작하는 듯했다가, 지난해처럼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날듯 말듯한 꿈을 지닌 채 잠에서 깨면 찝찝한 기분이 드는 듯했다. 소년은 이런 밤을 보내고 나면 속이 메말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꿈조차 꾸지 못하는 밤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형, 편지 봐줄래? 산타 할아버지한테 쓰는 거.”
소년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자신이 쓴 편지를 반듯하게 접어 소중한 비밀이라도 되는 듯 두 손으로 가려 들었다. 수줍게 전해진 동생의 비밀을 소년은 받아 들었다. 동생은 부끄러워하며 방으로 뛰어가 문을 닫았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지를 바라보았다. 올해의 숙제는 얼마나 무거울지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편지엔 무게가 없었다. 그렇게 가벼운 종잇장을 열어보기란 소년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 밤 소년은 침대에 누웠다. 편지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어둑한 냉기가 가득 찬 방에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것이 소년의 가슴을 조여왔다. 마치 폐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강력한 무언가가 서서히 소년의 숨을 꽉 쥐어버리는 듯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가슴과 목을 만졌다. 숨소리가 얇았다. 오늘은 긴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 소년의 귀에는 그 기침소리가 아득했다. 기침소리로 인해 고요하지 않은 차가운 밤의 고요가 무거웠다. 소년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꿈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소년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 동생이 원하는 선물이 담겨야 할 빈 선물상자. 빈 상자를 들여다보는 순간, 소년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감각을 느꼈다. 오늘 학교를 마치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서 크리스마스 전까지 근무시간을 조율해야 했다. 근무시간을 정하기 위해서는 동생이 가지고 싶은 선물의 크기를 가늠해야 했다. 소년은 동생의 편지를 만지작 거리다가 이내 선물상자에 넣어두고는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서만은 선물의 가격을 가늠하고 싶지 않았다.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동생의 책상 위에는 색연필이 흐트러져 있었다. 어제는 반듯해 보였던 편지가 조금씩 구겨져 있었다. 여러 번 접었다 폈다를 반복한 듯한 편지가 동생의 서툴고 삐뚤빼뚤한 글씨를 담고 있을 터였다. 편지 위에는 '산타할아버지께'라는 발신인이 적혀 있었다. 동생의 진심이 느껴지는 듯한 빨간색 편지지였다.
'산타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저는...'
소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동생이 원하던 선물의 가격을 가늠해 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무언지 얼마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얼마 전 동생을 위해 혹시라도 백화점에서 사줄 수 있는 선물이 있을지 먼저 다녀왔던 것이었다. 장난감 코너를 수도 없이 돌았다. 알록달록하고 요란한 장난감들과 인형과 로봇들의 향연이 펼쳐진 곳에서 소년은 길을 잃었다. 그의 눈에 담긴 대부분의 기억은 각 상품들의 가격이었다. 소년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금액이 즐비했다. 그 장난감 중 하나의 상품 앞에서 소년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른의 시각에서 봐도 화려하고 멋진 로봇이 위용을 뽐내며 전시되어 있었다. 소년은 이런 장난감을 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동생이 원하는 선물이 이것만은 아니길 빌었다.
그가 미리 알아버렸던 그 로봇은 소년이 아무리 일일 아르바이트를 늘리더라도, 건드릴 수 없는 어머니의 약값을 줄이더라도, 동생의 간식이나 자신의 식비를 줄이더라도 어떤 희생을 계산하더라도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그 선물은 소년의 세계, 소년의 우주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도 친구들처럼 멋진 로봇이 받고 싶어요
산타할아버지, 저 올해 착하게 지냈어요...'
소년은 어린 동생의 욕심을 미워하지 않았다. 동생의 희망을 미워하는 스스로가 미웠다. 소년의 머릿속이 아득해져 갔다. 한동안 편지를 다시 접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무거운 다리는 익숙했는데, 통제가 어려웠다. 어지럼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기침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말이 들려왔다.
'아들, 밥은 먹었어? 일하러 가기 힘들지? 엄마가 미안해'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드는 소년은 어머니가 누워있는 방으로 향했다. 작은 글씨들이 소년의 마음을 도려내듯 마음에 박혀 있었다.
'엄마.. 동생이 원하는 선물을 적어서 편지를 썼어. 근데 그거 얼만 줄 알아?'
소년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그림자 같았다. 그런 어머니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간헐적인 기침이 섞인 말이었다.
“올해는... 그래도 동생한테 좋은 선물 하나 해주자... 엄마가 당분간 약 좀 줄이면 돼"
소년은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엄마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가슴속에 박힌 동생의 글씨를 빼내러 어머니의 방에 들어갔지만 또 다른 말과 기침소리가 추가로 마음에 박혀버렸다. 편지를 쥐고 있던 손의 미세한 떨림이 이제는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들숨 날숨이 어려웠다. 소년은 다시 한번 표정을 숨겼다. 순간적으로 튀어 오르려 했던 감정을 다시 눌러 담아보았다.
'엄마 내가 할 수 있어, 매년 내가 다 준비했잖아, 걱정 마.'
방을 나와서 소년은 아르바이트 출근 시간을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좁은 거실에서의 걸음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계단을 내려가던 도중 소년은 순간 발을 헛디뎠다. 넘어질 뻔한 몸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의 제 자신의 표정을 떠올리려 했지만 자신의 얼굴은 도무지 읽히질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이 떨림은 단순한 피곤함이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제어 상실이었다. 이러한 미지의 현상은 낯선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괜찮아'하고 읊조렸다. 소년은 계단을 다 내려와서 어렴풋이 느꼈다. 애써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 집에서 누군가를 안심시키는 일이 이제는 조금은 버겁다는 것을.
소년의 출근길을 지켜주는 것은 노르스름한 황혼이었다. 머릿속을 비운 채 저벅저벅 걸었다. 겨울의 냉기를 어루만져 주기엔 황혼의 빛은 힘이 약했다. 학원가에 위치한 편의점 근처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분주하게 지나다녔다. 그 아이들의 기운은 그들 사이의 공기를 데우기엔 충분했다. 그렇지만 소년의 출근길은 혼자였다. 찬바람이 파고드는 길을 지나 편의점 문을 밀었을 때, 무색무취의 익숙한 공간이 펼쳐졌다. 소년과 교대하는 오후파트의 담당자는 시큰둥한 얼굴로 소년에게 간략한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소년은 숨을 깊게 들이켜고, 기계처럼 계산대 및 재고를 정리했다. 쓰레기를 비우고 바닥에 흘려진 음식물을 닦았다. 머리를 비우고 일을 하는 것은 망각에 도움이 되었다. 피로라는 말을 잊고 사는 사람처럼 정해진 움직임을 했다. 이러한 '준비'가 끝나면 가장 바쁜 시간이 시작되었다. 저마다의 교복차림으로 학교를 끝마친 학생들이 학원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저녁시간, 인수인계가 끝나고 이 시간만 되면 항상 식사 혹은 간식을 위해 학생들이 무더기로 몰려드는 통에 소년은 아르바이트 시작부터 정신없이 보내야 했다.
유난히 체력적인 한계를 느낀 날이었음에도 소년은 오늘도 버텨냈고, 잠시동안의 여유가 찾아온 순간 계산대 뒤의 간이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불안한 자세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얕은 잠에 빠져드는 것은 또다시 반복되는 악몽으로 소년을 초대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꿈은 훨씬 더 비좁았다. 꿈속에 나타나는 괴물이 형체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 것처럼, 꿈속 공간의 경계도 명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소년이 느끼는 감각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소년을 사방에서 조여 오고 있었다.
회색 빌딩들 사이로 굽이지는 골목, 소년은 발밑의 땅을 밀어내며 달렸다. 괴물의 그림자만은 분명하게 벽 위로 거대하게 드리워졌다. 숨은 들이마시면 들이마실수록 오히려 가슴이 답답했다.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골목 끝에는 빛이 있었지만 소년이 발을 구를 때마다 마치 그 빛까지의 거리가 신기루처럼 더 멀어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소년은 계속해서 달렸고 골목 끝 모서리에 다다랐다.
소년은 분명 골목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골목의 끝 모서리에 다다르니 공간은 마치 영화처럼 소년을 고층 건물 옥상으로 안내했다. 벽면이 춤을 추듯 흩어지면서 땅으로 꺼졌다. 건물 아래는 보이지 않는 빈 공간으로 채워졌다.
정신없이 내달리던 소년은 모서리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내달리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표정이 인식되었다. 울부짖던 평소의 악몽과는 달리 무표정 속에서 송진 같은 굵고 진득한 눈물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는 도중,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소년은 그 종소리로 인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헉 소리와 함께 눈을 뜨며 소년은 제 몸을 지탱하듯 계산대를 움켜쥐었다.
두 명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교복이 어색한 것으로 보아, 아마 소년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릴 터였다. 천진 난만하게 그 아이들은 컵라면이나 과자 코너에서 재잘거리며 웃었다. 계산대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장난과 웃음으로 떠들어댔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가벼웠다. 춥지도 무겁지도 않은 음계였다.
아이들은 한참을 떠들다가 고른 과자와 컵라면을 계산대에 올려놓고는 다시 자기들의 대화를 이어갔다.
“야, 이건 네가 사줘. 너 크리스마스에 핸드폰 바꾼다며.”
“아, 진짜. 내가 핸드폰 바꾸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부럽네, 우리 집은 그런 거 없는데.”
소년은 무표정하게 바코드를 찍었다. 그렇지만 소년의 가슴속에서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야, 오늘 진짜 추웠다. 학교 끝나고 피시방 갔다가 치킨 먹으러 가는 길 왜 이렇게 멀어? 추워 죽는 줄"
소년의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 그런 단어들은 금방 증발하거나 바로 흩어지는 단어들이었는데 오늘은 소년의 가슴에 와닿았다. 학교, 친구, 웃음, 치킨, 피시방, 핸드폰 익숙하지만 낯선 단어들이었다.
"형, 형은 몇 학년이에요? 아 나도 아르바이트해서 핸드폰 바꾸고 싶다."
소년은 아이들의 물건 가격과 봉투에 물건을 담아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 의미 없다. 아무 의미 없는 말들이다 하고 되뇌었다. 아이들이 봉투를 받아 들었고 다시 밝게 웃으며 편의점을 떠났다. 소년이 봉투를 건네었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좀처럼 팔과 손이 내려오질 않았다. 문이 닫히며 종이 울리는 순간, 그 짧은 순간에 들어온 겨울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폐를 관통하는 듯한 냉기였다. 종소리가 멎은 뒤 소년의 귓가에는 진공소리가 들렸다. 가만 멈춘 고요가 밀려들어왔다. 거친 숨을 쉬었다. 소년의 서있던 편의점 계산대 뒤의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바닥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는 듯했다.
편의점 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년의 내려오지 않는 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순간 아주 오랜 시간 숨겨왔던 세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이제 소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문장은 '왜 나만'으로 온통 도배되기 시작했다.
소년의 위태로움은 좀처럼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밖에선 눈이 펑펑 내리고, 길가의 학생들은 반가운 첫눈에 기뻐하는 표정과 목소리를 내었다. 바로 그때, 전화기의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년의 핸드폰은 좀처럼 울리는 일이 없었다. 통화목록은 대부분 어머니와 동생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소년의 근무시간에 전화를 거는 일이 없었다.
“아들... 엄마 숨이 좀 힘들다.. 동생이 무서워해서... 조금만 빨리 와주면..."
동생의 울음이 작게 섞여 있었다. 불안과 공포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아무리 숨을 들이켜려 해도 도무지 겨울 공기가 차가운 바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폐를 관통하는 그 날카로운 공기, 그 공기가 가슴속에 박히면 잘 내뱉어 지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눈발이 유리창에 닿아 하얗게 번졌다. 소년은 사장님께 연락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오늘 마감시간에 대해 의논했다. 사실상 별반 다르지 않은 퇴근시간에 대한 조율을 받고 소년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되면 지체 없이 편의점을 나서기 위함이었다.
창고에서 재고정리 후 쌓인 박스들을 정리하다가, 소년은 갑자기 호흡이 끊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들이마신 공기가 폐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선반의 한 모서리를 꽉 붙잡았다. 손끝이 파랗게 질렸다. 이유 없이 눈앞이 뿌예졌고, 가슴을 조여 오는 통증이 뚜렷해졌다. 숨을 들이마실수록 더 아팠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 순간 소년의 머릿속에서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도, 동생도, 오늘 아침의 일들도. 텅 비어버린 공허함이 소년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마치 자신이 사라져도 세상엔 아무 변화가 없을 거라는 듯이. 종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지만 소년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날 밤 소년은 마지막 꿈을 꾸었다. 이전에 꾸었던 꿈의 장소로 회귀한 소년은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벼랑 끝, 회색 바람, 도시의 불빛이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괴물은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쫓지도, 다가오지도 않았다. 마치 이미 싸움이 끝난 것처럼.
소년은 벼랑 끄트머리에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희미해지는 현실, 무너지는 경계, 사라져 가는 공포. 괴물이 다가오지 않는 이유를 소년은 알 것 같았다. 이제 더 도망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무섭지 않았다. 그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벼랑 끝에 서 있었던 사람이, 앉을자리를 찾듯 자연스레 내리는 선택처럼.
소년은 자신만의 안전한 악몽 속으로 도망쳤다. 악몽 속에서는 맘껏 울어버릴 수 있었고 마음껏 도망칠 수 있었다. 쫓아오는 괴물은 형체가 없었다. 그저 조금씩 소년에게 가까워질 뿐이었다. 꿈의 마지막은 소년의 선택이었다. 소년은 조용히 발끝을 내밀었다.
딱 한번 불꽃을 퉁기고 죽어버리는 담배꽁초처럼, 소년은 긴 잠을 청했다. 무너질 수 있는 세계로. 안전한 붕괴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