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자정.
민호는 인천국제공항 제3터미널 한복판에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렸지만,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트리 끝에 매달린 금빛 장식들이 부드럽게 빛을 밝혔다.
그가 손에 쥔 승차권엔
붉은 잉크로 ‘무정차’라 적혀 있었다.
종착도, 출발도 없는 티켓.
플랫폼을 향해 걸었다.
발걸음 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곳엔 겨울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처음에는 크리스마스 귀성객이라 생각했지만,
가만히 보니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내뱉는 말소리가 흩날렸다.
“그들은 다녀온 자들이야.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음 열차는 크리스마스 특급입니다.
목적지는... 고요한 밤.”
안내 방송을 듣던 민호는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계속 여기에 머물면,
돌아올 수 없겠다는 직감이 몸을 관통했다.
민호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공항 밖으로 뛰쳐나왔다.
막 떠나려는 다른 공항버스를 겨우 붙잡아 몸을 실었다.
운전석에는 산타 모자를 쓴 기사가 앉아 있었다.
도로 위에는 하얀 눈 대신 회색 잿가루가 덮여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종점은 12월 25일 자정, 고요한 밤입니다.”
안내 방송과 함께 버스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창밖 풍경은 익숙했지만,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다.
송도, 을왕리, 영종대교.
간판의 글자는 뒤집혀 있었고,
거리의 불빛은 미묘하게 깜박였다.
좌석에는 승객들이 앉아 있었다.
안도감은 잠시.
버스에 올라보니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선물 상자를 하나씩 들고 앉아 있었다.
“이 버스는 어디까지 갑니까?”
민호는 옆자리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상자를 민호에게 건네며 답했다.
“젊은이, 그걸 왜 나에게 묻나.
이 버스는 죽은 자들을 태운다네.
상자 안에는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순간이 들어 있지.”
민호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아침,
누나의 팔에 안겨 있는 네 살짜리 민호.
하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이 선명했다.
“기억은 선물이야.
하지만 그 기억이 너를 살릴 순 없지.”
노인의 느린 말소리에 비수가 날아들었다.
‘살릴 수 없다고?
설마 내가 죽었다는 거야?’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
승객들은 하나둘씩 재로 변하며 흩어졌다.
노인도 사라졌다.
버스 안은 점점 텅 비어갔다.
“왜 나만 남은 거지?”
민호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이제 버스는
눈길도, 도심도 아닌,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초조한 민호와 달리 손목시계는
자정에서 단 한 초도 움직이지 않았다.
민호는 고개를 들었다.
운전석 위 백미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 운전사는… 민호 자신이었다.
“네가 열 살 때,
그 버스 정류장 기억나지?”
“아니, 그건 실수였어! 나는—”
민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빙판 위에서… 너는,
네 누나를 밀었지. 실수?
아니,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지.”
“그건 정말 실수였어.
그리고 그 일은 다 잊었어.”
그러나 거울 속 민호는 웃었다.
“그게 문제야. 네 뇌는 그걸 믿지 않거든.”
버스가 멈췄다.
눈보라 속 낡은 정류장 표지판에
‘2015.12.24.’가 반짝였다.
언덕 위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눈은 얼어붙어 있었고,
겹쳐진 발자국들은 방향을 잃었다.
민호는 그 장면을 수없이 떠올려왔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은 늘 흐릿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버스가 멈추고 민호는 창밖을 보았다.
한 여자아이가 언덕 아래로 비틀거렸다.
눈발 사이로 흔들리는 붉은 목도리.
그것만으로도 민호는 알아볼 수 있었다.
“도와주세요!”
공기를 찢고 들어오는 목소리.
누나, 수진이었다.
언덕 아래에는 차도가 있었다.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성탄 장식처럼 반짝였다.
열 살 민호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기억 속에서 그는 늘 같은 말을 되뇌었다.
“누나가 미끄러진 거야.”
“나는 붙잡으려 했어.”
“그건 사고였어.”
오랫동안 그 문장만이 그를 붙잡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억이 말을 바꾸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올려다보는 수진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눈빛엔 여전히 신뢰가 있었다.
동생은 날 잡아줄 거라는 믿음.
그 순간, 민호의 안쪽에서
오래 묵은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항상 ‘먼저’였던 누나.
항상 ‘최고’였던 수진.
칭찬도, 관심도, 걱정도—
언제나 한 박자 늦게 도착한 위로의 시선.
언제나 ’ 덤‘이었던 동생 민호.
민호는 손을 뻗었다.
잡으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밀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짧은 순간,
선의와 악의는 구분되지 않았다.
완전히 겹쳤다.
손끝이 수진의 팔을 스쳤다.
너무 가벼운 접촉.
그래서 더 치명적인 힘.
미끄러진 게 아니었다.
균형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그가 밀었다.
수진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며,
언덕 아래로, 아래로.
“민호야 -! ”
그녀는 끝까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비난도, 원망도 없었다.
그 사실이 민호를 더 무너뜨렸다.
수진은 반짝이는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
눈발은 다시 고요해졌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갔다.
버스 안에서 민호는 몸을 웅크린 채 외쳤다.
“그건 악몽이야… 현실이 아니야!”
그러나 눈앞의 장면은 흩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그가 외면해 온 진실은
오래전부터 그를 태우고 있었다.
이 버스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정차한 적이 없었다.
심전도기의 파형이 물결을 그리기 시작했다.
민호는 병실 침대 위에 있었다.
머리맡 달력은 여전히 2015년 12월 24일.
병원 복도에는 캐롤이 흐르고 있었다.
침대 옆 의자에는 코트와 붉은 목도리가 놓여 있었다.
수진이 즐겨 입던 것들이었다.
창밖 하얀 눈 속에서, 수진은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슬픔과 이해, 오랜 기다림이 뒤섞여 있었다.
수진은 입술을 움직였다.
“이제 그만, 내려. 나를 놓아줘.”
민호는 흐릿하게 보이는 수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흐르며,
오랜 시간 숨겨왔던 죄책감이 천천히 풀렸다.
창문이 열리고,
하얀 재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며 흩날렸다.
붉은 승차권 한 장이 침대 위에 남았다.
‘무정차 – 종착: 고요한 밤’
민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누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러자, 병실은 따뜻하고 빛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오랜 어둠 속에서 마침내 진실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난 이제 갈게.”
속삭이는 수진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민호는 처음으로 죄책감 없이 미소 지었다.
“응... 함께였던 기억, 잊지 않을게.”
무정차의 여정 끝에서, 두 영혼은 비로소 자유로웠다.
창밖에는 하얀 눈이 내리며
민호의 화해와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고 있었다.
‘고요한 밤, 무정차’는
죄책감을 정차시키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는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에서 크리스마스는 끝없이 반복되는 기억이자 가장 따뜻해야 할 날에 가장 차갑게 멈춰버린 순간을, ‘고요한 밤’이라는 종착지는 진실을 직면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공명을 상징한다.
민호와 수진의 관계는 선과 악, 의도와 실수라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사랑과 질투, 보호와 파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잊음으로써 살아가는가, 아니면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살아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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