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Ep17. [소설] 각몽(覺夢)

각몽 : 꿈에서 깨어나다.

by 통나무집

검은 하늘에 눈발이 빗발쳤다. 거센 해풍에 휘말린 눈 알갱이들이 세차게 얼굴을 때렸다. 기석은 실눈을 뜨고 녹슨 철제 계단 아래를 바라보았다. 휘갈기는 눈발 사이로 어둠에 잠긴 건물들이 보였다. 철골 구조물만 앙상히 남은 작업장 옆으로 낡은 냉동고가 줄지어 서 있었다. 기석이 서 있는 공장 옥상은 시멘트 벽에 그을음과 곰팡이로 가득했다. 우그러진 연통에 바람이 부딪치면서 음산하게 웅웅 울렸다. 깨진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는 작업로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퇴락한 하역장과 부두가 보였다. 부두는 텅 비어 있었다. 기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올 시간이 지났는데... 정 씨가 많이 늦는군.'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 기석은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검은 수평선이 흐릿하게 보였다.

'오늘 밤 아이를 저 바다 건너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시킨다.'

기석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점검했다.

'조직원들이 밀어닥치기 전에 아이와 함께 무사히 정 씨의 배를 탈 수 있다면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뒤 직접 아이를 선교사에게 인계한다. 하지만 만일 정 씨보다 조직원들이 먼저 도착한다면.....'

기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기석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도착한 조직원들이 네 명 이하이면 내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어. 다섯 명 이상이면... 내가 조직원들을 붙잡아 두는 동안 정 씨가 아이를 데리고 탈출하면 돼. 그 이후는 정 씨가 알아서 해 주겠지. 만일, 정 씨가 나타나지 않으면..... '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자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기석은 머리를 흔들어 어두운 생각을 내쫓았다.

'정 씨가 오지 않으면 육로로 탈출하면 돼. 많이 어렵겠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기석은 다시 육지로 시선을 옮겼다. 주위를 둘러싼 철책과 부두로 통하는 입구를 구석구석 살피며 혹시 몰래 침입하는 자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아직 아무런 인적도 감지되지 않았다.

거칠게 불던 바람이 점점 잠잠해졌다. 거칠게 휘갈기던 눈발이 포근히 내리는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자기도 모르게 기석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구름이 조금 걷히면서 검푸른 밤하늘과 함께 달이 드러났다. 은은한 달빛으로 사위가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기석은 아이를 숨겨둔 하역장 경비실로 시선을 옮겼다. 경비실 창틀 너머로 침낭 속에 잠든 아이가 보였다.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석은 문득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를 처음 만났던 날 밤에 기석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훈춘시에 있었다. 기석에게 내려진 지령은 간단했다. 훈춘시 외곽에 탈북 가족이 숨어있다. 그들을 찾아 체포하라.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좋다. 탈북민의 수가 급증하여 국가보위성 요원들만으로는 그들을 모두 색출하기 어려워지자 북조선인민공화국은 중국에 소재한 거대 범죄 조직에게 탈북민의 납북 및 살해를 사주했는데 그 의뢰가 기석이 소속된 흑룡회에도 내려왔던 것이다. 요인 납치나 암살, 밀수 같은 일보다는 손쉬운 작업이었기에 기석은 가벼운 마음으로 세 명의 조직원들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작업 장소로 향했다. 승합차를 운전하는 기석에게 뒷자리에 앉은 광철이 말했다.

"어이. 기석 성님. 성님은 오늘 작업 때 후방에서 대기하시라우."

운전대를 잡은 기석의 손이 순간 움찔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르며 기석은 말했다.

"현장 일은 네 명이 함께 작업하는 게 원칙이야. 잘못하면 일을 그르쳐."

광철이 폭소를 터트렸다. 광철 옆에 앉은 나머지 두 사내도 키득키득 웃었다.

"말라비틀어진 탈북민 나부랭이들 잡겠다고 여기 네 사람이 모두 들어갈 것 없지 않갔서. 우리들이 다 알아서 할 기니 성님은 후방에서 편히 기다리시라우. 아, 성님 나이가 이제 쉰이 아니요. 이런 사소한 일까지 성님이 나설 것 없소."

짐짓 기석을 위하는 듯 말하지만 기석은 광철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 광철은 약자를 잔혹하게 짓밟으며 가학적인 쾌락을 즐기는 미치광이로 조직 내에서도 유명했다. 그런 광철에게 기석은 사사건건 원칙을 들먹이며 성가시게 구는 꼰대에 불과했다. 이번 작업에도 기석은 지령의 우선순위에 맞추어 탈북민을 체포하여 북송하는 일에 집중하려 할 것이 뻔했기에 광철은 기석을 작업 현장에서 제외하려 하는 것이다. 그런 광철의 속내가 뻔히 보였지만 기석은 광철과 더는 부딪치기 싫었다. 한 팀이 된 이후 무수히 광철과 부딪쳤기에 여기서 또 싸우는 게 피곤하기도 했고 이번 일은 광철의 말대로 네 명이 모두 투입돼야 할 만큼 위험한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겠네. 이번에는 후방에서 대기하지. 내가 없더라도 빈틈없이 처리해."

"걱정 붙들어 매시라우. 일이 끝나면 술이나 질탕 마시러 갑세다. 여그 오는 길에 휘황찬란한 갈보집을 봤으니끼니."

광철과 두 사내는 음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작업도 시작하기 전에 술과 여자를 생각하는 녀석들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기석은 잠자코 운전했다. 한밤이 되어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에 있는 조그만 농가 앞이었다.

"금방 끝내고 오갔어,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오."

광철은 능글능글 웃으며 두 사내와 함께 농가로 들어갔다. 기석은 승합차에 내려서 농가 주위를 살폈다. 농가에서 탈북민이 도주한다면 지나갈 만한 길목에 자리 잡은 기석은 착잡한 심정으로 농가를 주시했다.

'조직에 몸을 담은 지 스무 해가 넘어가니... 나도 퇴물이 다 됐구나. 저런 햇병아리 놈들에게도 얕보이고 있으니....'

한참을 기다려도 광철은 나오지 않았다. 농가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석은 혀를 끌끌 찼다.

'또 고문하고 있나 보구나. 추잡한 변태 새끼....'

그때 2층 창문이 깨지고 한 아이가 뛰어내렸다. 광철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잡으라우!"

아이는 땅에 떨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렸는지 다리를 절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기석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도망치는 방향에는 성인 남성도 뛰어넘기 어려운 넓이의 하수도가 깊게 파여 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아이는 하수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굴러 떨어졌다. 기석이 다가가보니 아이는 하수도에 고인 오물들 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광철이 천천히 다가왔다.

"... 더럽구먼.. 손도 대기 싫구만 기래. 저 놈은 성님 몫이오. 집 안에 시체들이 있으니 잘 처리하고 저 아이는 북조선 국보위 놈들에게 인계하시오."

아랫사람 대하듯 하대하는 말투에 기석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리 화낼 것 없소. 성님이 시체들과 저 아이를 처리하면 조직에서도 이번 작업은 성님이 다 한 걸로 알지 않갔어. 우리들은 이만 퇴근할터니 대신 성님은 실적을 챙기시라우."

피로 뒤덮인 채 음흉하게 웃는 광철의 꼴을 더는 보기 싫어 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철은 농가로 들어가 몸을 대충 씻은 뒤 두 사내를 거느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갈보집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기석은 농가로 들어갔다. 잔인하게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한 시체를 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욕지기를 내뱉으며 기석은 시체를 수습하여 승합차에 넣었다. 농가에서 사다리를 찾아서 기석은 하수도로 향했다. 은은히 쏟아지는 달빛 속에서 하수도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아이가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하수도로 내려온 기석은 오물로 범벅이 된 아이를 뒤집었다. 달빛이 아이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순간 기석은 멈칫했다.

'누구를 닮았는데....?'

기석은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기석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아이는 오래전에 죽었던 기석의 아들과 닮아 있었다.






중국의 범죄 조직에 들어오기 전에 기석은 제1공수특전단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기석은 대테러 임무, 특히 기밀을 요하는 작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계기로 북한을 상대로 은밀한 작전을 수행할 인재를 찾던 국가안전기획부는 기석을 차출하여 혹독한 훈련을 부여했다. 일 년 동안 서해 무인도에서 살인적인 훈련을 감당하고 있던 기석에게 안기부 부장이 찾아왔다. 부장은 기석의 작전지역이 중국 연변으로 결정되었다고 통보했다. 슬하에 세 살 아들이 있었던 기석은 중국행을 원치 않았지만, 부장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군소리 말고 연변으로 가라. 네 가족들은 국가가 책임지고 돌봐주겠다."

기석은 가족과의 모든 연락을 금지당한 채 연변의 허름한 뒷골목에 은거하면서 국가가 명하는 위험한 작전들을 외롭게 수행했다. 중국에 파견된 지 4년이 흘렀을 때 기석은 긴급 메시지를 받았다.

- 아들이 위독하니, 지금 바로 귀국하라

기석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급히 한국으로 돌아온 기석은 아들이 있다는 서울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들은 창백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기석은 의사에게 황급히 물었다.

"제 아들은 무슨 병입니까?"

의사는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폐 기능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어요.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다 해 보았지만... 증상이 좀처럼 호전되지 않네요."

"뭐라구요? 그럼 제 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만.... 일주일을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기석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의사를 붙들고 오열하며 애걸하기도 하고 아들을 당장 살려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아들의 병세를 막을 길이 없었다. 결국 일주일도 못 채우고 아들은 숨을 거두었다. 기석은 차갑게 식은 아들을 끌어안았다.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달빛이 아들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죽은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기석은 한참을 울었다. 기석의 울음은 치명상을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깊고도 맹렬했다.

기석의 아내는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몸부림을 치다가 아들의 장례식이 끝난 날 자살했다. 아내의 시신은 아내가 남긴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아들의 장지에 뿌려주었다. 기석은 술에 만취하여 흐느적흐느적 정처 없이 걸었다. 서울은 오랜만에 찾아온 화이트크리스마스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검은 하늘에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크리스마스트리가 도시를 화사하게 수놓고 있었다. 캐럴이 울려 퍼지는 거리에서 사람들의 표정은 한껏 들떠 있었고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신이 난 듯 경쾌하게 경적을 울리곤 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빨갛고 파랗고 노란, 온갖 색깔의 조명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서울 시내를 바라보며 기석은 죽은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달빛이 스며드는 병실 침대에 누워 푸른 달빛에 물든 아들의 차디찬 얼굴..... 기석의 내면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헛헛함과 피로감, 그리고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쳤다.

'가족은 국가가 책임져준다고...... 씨벌놈들.....'

그날 밤 기석은 종적을 감추었다. 기석의 실종에 당황한 안기부는 한국과 중국을 수색했지만 어디서도 기석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밀항한 기석은 광활한 중국 일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안기부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기가 점점 버거워질 무렵 기석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잠식하고 있던 흑룡회에 포섭되었다. 흑룡회 옌진시 지부장인 마톈즈는 연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기석과 종종 접선하여 북조선의 고급 정보들을 안기부에 팔아넘기곤 했다. 기석이 안기부를 떠나 중국을 떠돌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마톈즈는 수하를 기섭에게 보내 흑룡회에 들어오길 권했다. 안기부의 눈을 피할 은신처를 찾고 있던 기석은 마톈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흑룡회에서 기석은 폭주했다. 흑룡회가 명하는 납치, 암살, 밀수, 폭탄 테러 등의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기석의 내면에 비대하게 응어리한이 폭발했다. 허망하게 아이와 아내를 잃은 슬픔, 가족을 방치했던 국가에 대한 분노, 공수특전단과 안기부 비밀요원 생활 동안 극도로 억눌러왔던 욕망 등이 잔혹한 폭력으로 터져 나왔다. 흑룡회와 삼합회 조직원들 사이에서 패싸움이 일어났을 때 기석은 광기에 사로잡혀 적들을 쇠파이프로 후려 치고, 군홧발로 짓밟고, 칼로 난도질하고, 망치로 머리를 깨부수었다. 싸움이 끝났을 무렵, 피로 범벅이 되어 반쯤 미쳐버린 눈빛으로 거친 호흡을 내쉬는 기석을 보며 흑룡회 조직원들도 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밀히 잠입하여 요인을 사살하거나 몰래 폭탄을 설치하여 다수의 적을 일거에 폭사시키는 작업에서 기석은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공수특전단과 안기부 소속 비밀 요원으로서 연마한 전투 능력 덕분에 기석은 단기간에 흑룡회의 행동 대장 자리까지 꿰찰 수 있었다. 석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연변 곳곳을 누비며 피 비린내 가득한 살육을 저질렀고 작업이 끝나면 고급 요정에 처박혀 술과 여자들에 빠져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십 년이 흘러갔다. 기석은 묵직한 허무감에 시달렸다. 무저갱처럼 깊이 뚫려버린 기석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잔혹한 폭력도, 질탕한 술판도, 매혹적인 여성도, 그 어떤 것도 기석의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점차 기석은 조직이 명하는 작업들에 시들해졌고 다른 조직원에게 자주 일을 넘겼다. 나이가 마흔 중반을 넘어서자 기석은 조직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차량 운전이나 시체 처리를 담당하며 다른 조직원들의 작업을 보조하는 퇴물 신세로 전락했다.

그 무렵 흑룡회에 탈북민 추포 의뢰가 들어왔다. 탈북민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은 난이도가 낮은 만큼 보수가 적었기에 퇴물 취급을 받는 기석 흑롱회에 들어온 지 일 년도 되지 않는 광철 및 신입들에게 할당되었다. 북조선 국보위 요원이었다가 북한의 정치 구도 변화로 숙청의 위기에 몰려 탈북한 광철은 흑룡회에 들어온 후 입지를 다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실적을 올리려 광포하게 날뛰는 광철을 볼 때마다 기석은 광기 어린 충동에 휩쓸잔혹한 폭력이 주는 쾌감에 깊이 빠져들었던 지난 시절이 떠올랐다.

'아무 쓸데없는 짓들이었어... 결국 이렇게 헛헛하기만 하니...'

기석은 후배들에게 불필요한 폭력을 불허했다. 기석이 흑룡회에서 쌓아왔던 업적들이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었기에, 기석을 존경하는 후배들은 기석의 지침을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러나 황광철과 광철을 추종하는 신입들은 기석을 고깝게 여겼다. 피에 굶주린 이리처럼 폭력을 갈구하는 광철은 폭력을 행사하려 할 때마다 제지하고 나서는 기석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광철은 추종자들에게 말하곤 했다.

"기석 성 같은 꼰대 시끼가 가로막고 있어서 우리들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거라우. 기집애처럼 유약한 새끼가 선배랍시고 유세를 떠는 꼴을 더는 못 봐 주갔어. 내 국보위 시절에도 종종 느꼈는데 기석 성 같은 종자들은 드시 조직을 배신할 악성 분자들이야. 두고 보라우. 내 언젠가 본 때를 보여줄기니."




기석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의식을 잃은 아이는 기석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나이는 열 살 즈음되었을까. 오랫동안 잘 먹지 못했던지 아이의 몸은 무척 가벼웠다. 기석은 다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심하게 야윈 아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내 아들이 죽기 직전에 저런 얼굴이었지...'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푸른 달빛에 물들어 있던 아들의 차디찬 얼굴... 그 얼굴에 다시 온기가 돌아오기를, 아들의 코에서 숨결이 다시 살아나길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기석은 품에 안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따스한 온기와 함께 가벼운 숨결이 느껴졌다. 석의 마음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오랫동안 유폐되었던 회한과 슬픔이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은 눈물이 아이의 얼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기석은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오열했다.

울음을 수습한 기석은 아이를 둘러메고 사다리를 타고 하수도 위로 올라왔다. 아이는 좀처럼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아이의 몸 상태를 확인하니 온몸에 타박상 있었지만 다행히 접질린 발목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농가에서 목격한 잔혹한 장면으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에, 하수도에 추락하면서 받은 충격이 더해지면서 아이는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이 아이만은 살려낸다...반드시....'

기석은 승합차 보조석에 아이 몸을 실은 후 자신의 숙소를 향해 운전했다. 숙소에 아이를 누인 뒤, 현금을 챙긴 기석은 승합차를 몰고 북한 국보위 원과 접선하는 장소로 갔다. 국보위 요원은 기석의 차가 약속된 접선 시간보다 늦게 도착해서 심술이 나 있었다.

"왜 이렇게 늦으셨소? 작업이 끝나고 어디 술집에라도 들른 것 아니오?"

"광철이 쓸데없이 고문을 실시해서 늦어졌소. 아시지 않소? 그 녀석의 몹쓸 취향을 말이오."

국보위 요원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후 승합차 뒷 문을 열였다. 피 비린내가 물씬 밀려오면서 잔혹하게 고문한 흔적이 가득한 시체들이 드러났다. 국보위 요원의 눈이 한껏 찡그려졌다.

"중년 남녀 시체 각각 한 구... 추포 명단에는 아이도 하나 있는데? 아이는 어디 있소?"

"아이는 도주하다가 하수도로 추락하여 목이 부러져 죽었소. 아이 몸이 온통 오물 범벅이어서 끌어내기 싫었소. 확실히 사망한 것을 확인하고 깊은 하수구에 던져놓고 왔소."

기철은 지폐 다발을 꺼내 국보위 요원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제 당신이 저 차를 몰고 북조선으로 복귀해야 할 텐데 피비린내 속에서 운전하게 해서 미안하오. 광철이 쓸데없이 고문하는 걸 내가 막았으면 접선 시간도 지키고 일도 깔끔히 마무리 됐을 것을... 오물 투성이인 아이 시체까지 실으면 피 비린내에 똥오줌 냄새까지 진동할게 뻔해서 내가 잘 처리하고 왔소. 이래저래 일처리가 말끔하지 못해 미안하오. 이 돈은 사과의 의미로 드리는 것이니 윗선에는 당신이 잘 보고해 주시오."

국보위 요원은 덤덤한 표정으로 돈을 받았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북조선의 요원이니 이런 뒷돈 수수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었다. 국보위 요원은 승합차 뒷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 타 시동을 건 뒤 기석에게 말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니, 선물로 내 특별히 이번은 눈 감아 주갔소. 다음 작업은 빈틈없이 잘 처리하시오."

국보위 요원이 모는 승합차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기석은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갔다. 기석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점검한 후,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뚜.. 뚜우... 신호음이 가는데 상대는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 씨.. 밤이 늦긴 했지만.. 제발 전화를 받아...'

그때 철컥 통화가 연결되고 볼 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니미럴. 뉘기여?! 이 야밤에 뭔 전화질이랑가?"

기석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야. 한기석."

정 씨의 목소리가 공손해졌다.

"워메... 기석 형님이셨구먼이라. 이 야심한 밤에 전화를 주시다니.. 행님 목소리가 심상치 않으신데 무슨 일 있으시오?"

"긴급 상황이야. 주위에 아무도 없지?"

정 씨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지 혼자 뿐이어라. 대체 뭔 일입니껴?"

"사내아이 한 명을 훈춘 시에서 남한으로 최대한 빨리 밀입국시킬 방도가 필요해. 찾아줄 수 있나?"

"남한으로.. 밀입국....아이를... 말이어라...?'

정 씨는 밀항을 주로 처리하는 브로커였다. 중국 범죄 조직 사이에서 세력 다툼이 극심했던 시절에 흑룡회를 급습한 삼합회가 정 씨를 포함해서 다수의 조직원들을 납치한 일이 있었다. 기석이 수하들을 이끌고 목숨을 건 활약을 펼친 끝에 정 씨와 조직원들을 모두 구출해 냈다. 그 일을 계기로 정 씨는 기석의 충직한 람이 되어 있었다. 기석의 급작스런 부탁에 의아해하면서도 정 씨는 기억을 더듬어 적의 밀항 루트를 생각해 냈다.

"훈춘 시에서 70km 정도 떨어진 자루비노 항구에 버려진 부두가 있는디... 원래 생선 가공 공장이 있던 곳인데 3년 전 화재 이후 인적이 끊겨서 종종 밀항 루트로 썼던 곳이여. 자루비노 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간 후에 선교사로 신분을 위장한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남한으로 가는 배를 타면 되는디요...."

"내가 직접 내일 20시에 자루비노항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겠네. 배를 마련해 주게."

"내일이요? 너무 급한디요..."

"정 씨. 제발 부탁하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 아이는 살려 보내야겠어."

정 씨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알겠어라... 그럼 지가 직접 배를 구해 내일 20시까지 자루비노 항구로 가겠어라."

기석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정말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정 씨가 웃으며 말했다.

"형님이 안 계셨으면 지는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구먼. 행님에게 은혜 갚을 날을 고대하고 있었는디 잘됐구먼잉. 마침 내일이 크리스마스여서 빈 배들이 많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요. 지가 책임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잘 모셔다 드릴 것이구먼. 그럼 내일 20시에 자루비노 항에서 뵙겠어라."

정 씨와 통화를 마친 기석은 숙소로 돌아왔다. 방바닥에 눕혀놓은 아이는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저 아이는 농가에서 끔찍하게 험한 꼴을 봐야 했겠지... 광철을 끝까지 막았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야.'

죄책감이 진하게 밀려왔다. 기석은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의 코에 손을 대보았다.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다. 먹먹한 슬픔 속에서 기석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너만은 꼭 살려서 남한으로 보내주마."




굵은 함박눈이 자루비노 항구의 버려진 부두 위로 쏟아졌다. 계단 밑에 보이는 하역장의 경비실 지붕 위에도 눈이 수북이 쌓였다. 기석은 경비실 창틀 너머로 침낭 속에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 얼굴 위로 푸른 달빛이 비쳤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라고 했지....'

문득 기석은 아들과 아내의 장례를 치른 뒤 맞이했던 크리스마스가 떠올랐다. 검은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던 함박눈,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로 화려하게 빛나던 서울, 행복한 표정으로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 그때 느꼈던 슬픔과 분노가 아릿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중국으로 밀항한 후 중국 일대를 방황했다가 흑룡회에 들어가 폭력과 술에 절어 살았던 시절도 떠올랐다. 광포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증오와 원한을 폭발시켰던 순간들이 이제는 마치 오랜 꿈처럼 어렴풋하기만 했다.

'지독한 악몽과도 같은 시간들이었어.'

기석은 다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이를 남한으로 보내고 나면 어디 제3국으로 떠나서 새 출발을 하자. 이제 악몽 같은 과거에서 벗어나는 거야.'

그 순간 기석의 허리춤에 달린 무전기에서 칙칙 소리가 났다. 얼굴이 밝아진 기석은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정 씨. 도착했나?"

- 그라믄요. 15분 뒤면 도착하요.

바다 쪽을 바라보니 멀리서 어선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좀 늦었군."

- 우라질 놈의 날씨 땜시 애 좀 먹었당게요. 좀만 기다리쇼 잉.

기석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기석의 신경이 곤두섰다. 공장 입구 방향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승합차 두 대가 공장 출입구 앞에 멈추었다. 자동차에서 손전등과 무기를 든 사내들이 내렸다. 하나, 둘, 셋.... 차에서 내리는 사내들의 인원수와 무장 상태를 확인하는 기석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내들은 모두 열여섯 명. AK-47 소총을 소지한 사람이 여덟. 나머지 여덟은 저마다 권총, 나이프, 쇠사슬,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했다. 기석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나 같은 퇴물 하나 잡겠다고 열여섯 명이나 동원하다니....'

쓴웃음이 나왔다. 기석은 무전기를 들었다.

"정 씨. 사냥개들이 도착했어. 플랜 B로 간다. 하역장 근처 경비실에 아이가 있으니 아이를 데리고 먼저 탈출해라."

- 행님은 어떡하실라구요?

"나는 알아서 탈출한다. 내 솜씨 잘 알잖아. 놈들을 붙들어 놓고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탈출해. 정 씨가 탈출해야 나도 탈출할 수 있으니까.

- 알겠으요. 그럼 30분만 버텨주쇼잉.

사내들 사이에서 잔혹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쥐새끼를 잡을 시간이다. 조별로 흩어지라우!"

분명 광철의 목소리였다. 광철의 명령에 따라 사내들은 4인 1조로 나뉘어 공장 지대 안으로 진입했다. 한 조는 곧장 부두로 향했고, 한 조는 동쪽, 한 조는 서쪽, 나머지 한 조는 중앙을 수색하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정 씨에게 호기롭게 말하긴 했지만 완전 무장한 열여섯 명을 상대로 나까지 탈출하긴 어렵겠지. 시간을 얼마나 벌 수 있을까?'

기석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생각이 명징해졌다.

'나는 여기서 죽겠지만... 저승으로 가는 길이 외롭진 않겠군.'

숨을 서서히 내뱉으며 눈을 뜬 기석은 먼저 부두로 향하는 사내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기석의 예상대로 사내들은 부두로 접어드는 길목을 지나고 있었다.

'우선 환영 인사를 해줘야지.'

기석은 손에 든 무전기의 채널을 바꾼 다음 버튼을 눌렀다.


꽈-앙


폭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사내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쓰러진 사내들 중 세 명은 움직이지 않았고 한 명은 꿈틀거리며 구슬픈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제군들. 내 악몽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기석은 계단을 뛰어내려가 대형 냉동고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사내들이 경악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기럴! 놈에게 폭탄이 있다!"

"어떻게 하지?! 일단 후퇴할까?"

광철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모두 흩어져 놈을 찾아! 또 폭탄을 터뜨리기 전에 죽여버려!"

사내들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기석은 그림자가 진 곳을 이용해서 은밀히 이동했다. 컨테이너 뒤에 몸을 숨긴 기석은 손전등으로 여기저기를 비춰보며 주위를 수색하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기석은 호흡을 고른 뒤 단검을 빼어 들었다. 사내가 등을 돌린 순간 기석은 달려 나가 사내의 입을 틀어막고 칼로 목을 그었다. 사내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기석은 사내가 떨어트린 권총을 주워 들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공장 건물 속으로 잠입한 기석은 권총을 확인했다. 러시아제 마카로프 피스톨. 장탄수 5발. 공장의 창문 너머로 네 명의 사내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모두 AK-47 소총을 들고 있었다. 사내들이 한 손에 소총을 어색하게 들고 다른 한 손에 든 손전등으로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비추는 모습을 보며 기석은 실소했다.

'풋내기들이군. 야간 전투에서 손전등과 소총을 동시에 들고 있으면....'

기석은 창문 가까이에 있는 사내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가 사내들의 총구 방향이 엉클어진 순간을 노려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사내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놈이다!"

주위에 있던 사내들이 놀라서 창문을 향해 소총을 돌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다다다다다


AK-47 소총은 사내들의 의지와 달리 제멋대로 움직이며 불을 뿜었다. 반동이 심한 AK-47 소총은 격발 할 때 두 손으로 제어해도 조준이 어렵다. 사내들은 한 손으로 AK-47 소총을 들고 있다가 매우 당황한 순간에 격발을 하였으니 조준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세 대의 소총은 기석이 숨어 있는 창문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사정없이 난사되었다. 사내들은 온몸이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광철아. 나를 쉽게 잡겠다고 부하들에게 소총까지 지급한 모양이다만.... 총을 함부로 미숙련자에게 쥐어주면 자살 도구밖에 되지 않아...'


처리한 적은 아홉. 남은 적은 일곱. 기석은 권총으로 사살한 사내의 시체에 다가갔다. 사내의 점퍼를 벗겨서 입은 기석은 사내의 피를 얼굴에 잔뜩 묻힌 후 사내의 손전등과 AK-47소총을 집어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제부터는 배짱 싸움이야.'


기석은 손전등을 비추며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전방에 네 명의 사내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사내들이 기석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손전등의 불빛에 기석이 훤히 드러나는 순간 사내들은 멈칫했다. 사내들은 눈앞에서 동료의 총과 손전등을 든 채 동료의 점퍼를 입고 온몸과 얼굴에 피칠이 되어 있는 사람이 진짜 동료인지 아니면 적인지 잠시 구분이 되지 않았다. 기석이 어둠 속에 숨어있지 않고 이렇게 대범하게 활보할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 사내들을 향해 달려가면서 기석은 손전등을 버린 후 소총을 쥐어 잡고 격발 했다.


타다다. 타타다. 투다다다


기석의 바로 앞에 있던 적이 피를 뿜었다. 다른 사내들은 총알이 날아오자 공포에 질려 몸을 숨기거나 기석을 향해 뒤늦게 총을 겨누어 격발 했다. 사내들이 당황해서 격발 한 소총은 기석을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사방으로 난사되었다. 비명소리가 치솟고 눈먼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아비규환 속에서 기석은 몸을 사리지 않고 침착하게 한 명씩 사살했다. 단숨에 네 명의 사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크윽."


기석은 신음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흥건히 흘러나왔다. 적이 난사한 총알이 관통한 것 같았다. 기석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출혈이 심한지 시야가 계속 흐려졌다. 흩어지는 정신을 수습하려 애를 쓰며 기석은 소총을 버리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남은 적은 셋. 탄창에 남은 총알은 4발...'


몸 상태를 보았을 때 한 발 정도만 제대로 격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석은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지금쯤 정 씨는 아이를 태우고 출발했겠지만... 아직 소총의 사정거리를 벗어날 만큼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시간을 더 끌어야 해. 어떻게 해야 하나....'


기석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 남은 세 명은 분명 광철과 그를 추종하는 신입 두 사람이다. 오만하고 잔인하면서 비열한 녀석들. 놈들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윽고 눈을 뜬 기석의 표정에 결연한 각오가 떠올랐다.


'광철은 무력한 자에게 더없이 잔혹하지.. 거기에 승부를 걸어보자.'


기석은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부두 근처에 있는 하역장으로 향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나고 수하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진 뒤 주위가 고요해졌을 때 광철은 몸을 숨긴 작업장에서 잠시 고민했다.

'한기석. 이 종간나이 새끼. 생각보다 실력이 대단하군기래. 일단 물러나 후일을 도모할까.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 놈을 죽일까...'

광철의 옆에 있던 사내가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성님. 상대가 생각보다 강하요. 이만 포기하고 갑세다."

광철은 버럭 화를 냈다.

"동무는 기집애같이 겁이 많구먼. 그리고 기냥 이대로 돌아가면 두목이 우릴 가만 두갔어? 동료들을 다 잃은 책임으로 처형당할 게 뻔하지 않간? 저 넘을 직여야 우리도 살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잔 말이요. 이제 우리 셋만 남은 것 같은데......."

그때 광철의 눈에 창문 너머 저 멀리서 기석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기석은 부두를 향해 절뚝이며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저 새끼가 날고 긴다고 해도 총으로 무장한 내 수하들과 싸우면서 멀쩡할리 없어. 이제 다 해치운 줄 알고 안심하고 부두로 가는구먼기래. 저 시끼 뒤를 치면 되갔어.'

광철은 수하에게 속삭였다.

"저기 보라우.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부두로 가고 있지 않간? 지금 습격해야 저 시끼를 죽일 수 있어. 자. 날래 따라오라우."

광철은 두 사내를 이끌고 황급히 기석의 뒤를 쫓았다. 기석의 뒤로 핏줄기가 길게 이어져있었다. 피를 많이 흘렸는지 기석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광철의 옆에 있던 사내가 기석을 향해 총을 겨누자 광철이 막았다.

"저 시끼 손에 우리 동지들이 많이 죽었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야 해."

부두 앞 하역장에 도착한 기석은 철퍼덕 주저앉았다. 광철과 두 사내는 총을 겨누고 기석에게 다가갔다. 기석은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광철은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한기석. 흑룡회 안에서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사내. 폭력으로 승승장구했으면서 내 폭력은 끈덕지게 막았던 위선적인 놈. 내 앞길을 사사건건 가로막았던 꼰대 시끼. 이 새끼를 어떻게 난도질을 할까. 광철은 기석을 상대로 펼칠 가학적인 쾌락에 설레어하면서 기석에게 다가갔다. 광철은 명령했다.

"저 새끼를 일으켜 세우라우."

두 사내가 기석에게 다가가 기석의 손에 들린 총을 빼앗은 후 기석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총상을 입은 어깨가 붙들리자 기석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광철은 무척 감미로웠다. 광철은 천천히 단검을 빼어 들었다.

"한기석. 어느 부위부터 도려내줄까."

고개를 푹 숙인 기석이 작게 웅얼거렸다. 언뜻 듣기에 살려달라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 같았다. 광철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기석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뭐라고? 다시 말해보라우."

기석이 다시 웅얼거렸다. 짜증이 난 광철은 주먹으로 기석의 얼굴을 후려치며 말했다.

"종간나이 새끼. 좀 크게 말하라우. 살려달라 애걸하란 말이다."

그때 기석이 얼굴을 들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광철. 이 개새끼야. 나와 같이 지옥으로 가자."

광철이 광포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시끼가 무슨 수로? 지옥은 이제부터 내가 친히 보여주갔어."

기석은 희미하게 웃었다. 광철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때 기석의 뒤편의 하역장에 쌓인 나무 상자들에서 '끼릭'하는 소리가 났다. 광철이 놀라서 쳐다보는 순간..


꽈-앙


상자에 몰래 설치된 폭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기석과 광철, 사내들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바다로 날아갔다.




저 멀리 부두에서 거대한 폭발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자 정 씨는 손에 든 무전기를 간판 위로 집어던졌다. 정 씨는 어선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기석 행님. 제게 왜 그런 짓을 하게 만드셨습니껴.'

정 씨는 폭발이 있기 얼마 전에 기석과 무전으로 대화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정 씨가 하역장 경비실에 숨겨진 아이를 찾아 배에 태워서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정 씨의 무전기가 울렸다.


"아따 형님. 한 판 거하게 하셨나 보구먼잉. 폭발음에 총소리에 난리도 아니었어라. 허허."


- 정 씨... 부탁이 있어.


심상치 않은 기석의 목소리에 정 씨가 놀라서 말했다.


"형님. 목소리가 와 이리 힘이 없소. 혹시 많이 다치셨소?"


- 정 씨.. 내 말 잘 들어. 무전기 주파수를 153으로 맞추고 있다가 부두 위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붙들리는 순간 송신 버튼을 눌러줘.


"그게 무슨 말이요? 형님.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지가 바로 부두로 배를 돌리겄어라."


기석이 절박하게 말했다.


- 제발... 정 씨. 그렇게 하면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 모두 헛수고가 돼. 제발 부탁이야... 내 말대로 해줘.


기석과 오래 알고 지냈던 정 씨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이 기석 형님의 마지막이구나.....'


"알겠어라.. 형님. 혹시 남기고 싶은 말은 없소?"


- 아이에게 전해줘.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정 씨는 울면서 물었다.


"형님이 목숨을 버리면서 아이를 구해주시고 있는데... 도대체 아이에게 뭐가 그리 고마우신 게요?"


기석이 웃으며 말했다.


- 그 아이 덕분에 오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정말 고마운 일이지...





정 씨의 배가 사라진 수평선 위로 아침해가 떠올랐다. 따스하게 내리는 햇살이 물결에 부딪쳐 은빛으로 부서졌다. 흔들리는 물결을 타고 사내들의 시체가 떠밀려 왔다. 햇살은 죽은 사내 위에도 부드럽게 내렸다. 찬란한 햇살이 한 사내의 얼굴을 드러냈다. 기석이었다. 몸은 갈기갈기 찢겼지만 기석의 얼굴은 오래 시달린 악몽에서 깨어난 듯 편안해 보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Ep.16 [소설] 쳇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