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20주차, 깨찰빵의 추억
비몽사몽 게으름이 잔뜩 묻은 어느 주말의 아침, 잠에서 깬 나는 거실로 나왔다. 주말 아침엔 아내나 나나 둘 다 늦잠을 즐기는 편인데, 최근 들어 나는 평소보단 두어 시간 정도 먼저 깨곤 했다. 오늘도 아내가 깨어날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난 나는 아내보다 먼저 거실로 나온 것이었다. 아내가 좀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안방 문을 조심스레 닫아주고는 거실로 나와서 소리를 0으로 낮춘 후 TV를 틀었다. 멍하니 명상이라도 하듯 서서히 잠에서 깨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어제 아내와 함께 데이트를 끝내고 들어오는 길에 사 왔던 빵이었다. 지하철 개찰구 앞이나, 환승을 위해 이동하는 통로에 가끔씩 보이는 저가형 제과점에서 산 것이었다.
강력한 유혹의 향기인 델리만쥬의 고소함에도 잘 넘어가지 않는 우리였는데, 그날은 갑작스레 그 빵이 너무나 맛있게 보였더랬다. 가격도 워낙 싸다 보니 만원만 있어도 여러 족히 5개가 넘는 빵을 담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물론 임산부인 아내가 그 빵이 눈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우리의 작은 충동구매를 결정짓는 버튼이 되었다.
이 미니 제과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커피를 좋아하는 내가 커피와 같이 먹기에 좋은 모카번과 달달하면서도 쫀득한 찹쌀빵, 고소하고 담백한 깨찰빵, 부드럽고 폭신한 머핀까지 작지만 다양한 종류의 빵을 아주 저렴하게 판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달달하면서도 꼬순 냄새가 나는 옥수수 깨찰빵과 찹쌀빵을, 나는 주말에 커피와 함께 먹을 생각으로 모카번을 골랐다. 그날 밤, 우린 찹쌀빵 정도만 맛을 보고 주말에 먹기 위해 모카번과 깨찰빵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아내는 아직 잠들어 있었던 다음날 아침, 이 빵들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골랐던 모카번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고 아내가 골랐던 깨찰빵은 식탁에 놓여 있었다. 나는 잠이 덜 깬 몽롱한 정신상태와 긴 늦잠을 자고 난 뒤의 허기짐이 섞여 무의식적으로(?) 그 빵을 집어 들어서 바로 으적 베어 물었다.
얼마 후 아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안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세수를 하고, 물을 마시고 나른함을 깨웠다. 같이 소파에 앉아 아침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소파 앞에 놓인 간이 테이블에 빵을 포장했던 봉투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 자기가 깨찰빵 먹었어?'
나는 아내의 입이 떨어지자마자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그 빵의 맛을 크게 느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저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을 바로 입에 넣었고, 입속에서 자작운동을 하며 서서히 잠에서 깼던 것 같다. 그런데 대상이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졸지에 임산부가 먹고 싶어 했던 음식을 날름 먹어버린 눈치 없는 바보 남편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는 일이었는데, 아내의 그 말을 들었던 순간 등골이 서늘했던 것만 같다(?).
'깨찰빵은 내껀데!?'
아내도 나의 실수가 어느 정도 웃긴 구석이 있었던지 이날 하루 익살스러운 꾸지람을 한 번씩 건넸다.
'자기꺼 모카빵은 내가 먹어버린다!?'
'옥수수 깨찰빵... 무슨 맛이었어? 맛있었지?'
다시 사 올지 물어보는 내게 아내는 피식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지금도 가끔 이때를 다시 떠올리면 당장 나가서 빵을 사 왔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확신을 갖게 된 생각도 있다.
'임산부가 먹고 싶어서 고른 음식은 하나만 사지 말 것'
바보 남편이 되지 않기 위한 기초적 생존 노하우이다.
한 줄 정보
1. 임산부의 식욕은 ‘양’보다 ‘대상’이 중요해, 같은 음식이라도 대체가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2. 임신 기간의 작은 배려 경험은 출산 후 양육 협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3. 임산부 본인은 화를 내지 않았더라도, 상대의 미안함이 더 오래 남는 경우도 흔하다.
4. 임신기 부부 갈등의 상당수는 의도보다는 ‘무의식적 행동’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5. 이런 사소한 해프닝을 웃음으로 정리하는 경험은 부부 유대감을 강화한다.
6. 임신의 딱 중반을 지나는 시점, 태아는 24cm, 약 300g 정도의 크기까지 자랐다.
7. 산모는 부종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편한 신발이 필수이며 꽉 끼는 단화나 스타킹은 혈액순환을 방해해서 부종이 심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