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21주차, 도쿄 태교여행 Day 2
둘째 날의 본격적인 일정은 아사쿠사에서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토를 다녀온 터라, 아사쿠사의 분위기가 특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교토에서 느꼈던 고즈넉함이나 압도적인 시간의 깊이 같은 것은 아사쿠사에서는 조금 덜 느껴졌던 것이다. 대신 이곳은 관광지라는 이름답게 더 분주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건물이나 풍경보다 사람들의 얼굴과 움직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특별하지 않아서 좋았고, 그래서 여행지라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재’에 더 가까운 공간처럼 느껴졌다.
아사쿠사에서 조금 벗어나 10여 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고구마 맛탕’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아내가 꼭 맛보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현금만 받는 가게라 다시 15분 거리를 걸어 현금을 인출해 와야 했지만, 그 정도 수고쯤은 별일이 아니었다.
고구마 맛탕 하나만 파는 가게가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유명 맛집이라 해도 고구마에 설탕이 그리 대단할 게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외관은 꽤 허름했지만, 계산을 마치고 따뜻한 상태로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니, 이 작은 게 뭐라고 이렇게 특별한 맛일까 싶을 정도로 놀라울 만큼 맛이 좋았다.
점심으로는 츠케멘과 라멘을 각각 먹고, 다음 일정으로 도쿄 미술관을 방문했다. 뱃속의 사랑이와 함께하는 첫 공식 일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서양미술과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며 나름 태교다운 태교를 했다.
‘오늘 많이 걸어서 힘들지? 중간중간에 벤치에 앉아서 쉬면서 무리하지 말자.’
작품 수가 많기도 했지만, 오늘 우리의 관람 템포는 한 박자 느렸다. 그렇지만 이 느린 속도가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전시장 한가운데나 한쪽 구석 창가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잠시 멈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작품을 한 발짝 떨어져 다시 바라보는 것도 좋았고, 아내의 배에 손을 얹으면 마치 아가와 함께 작품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미술관 밖 공원의 녹색을 바라보는 시간 역시, 조용한 멈춤 속의 힐링이었다.
쉬다가 다시 일어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내가 한 작품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아내는 이미 다음 전시장으로 이동해 있곤 했다. 나는 유독 ‘미술관 속의 아내’를 분위기 있게 사진으로 담아주고 싶었다. 열심히 셔터를 눌러봤지만, 한참 부족한 사진 실력 탓에 마음에 드는 결과물은 남기지 못했다.
나는 정말 좋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아니면 좀처럼 사진을 찍지 않는데, 이상하게 이 공간에서는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자주 들었다. 아마도 아가와 셋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술관을 나오면 바로 우에노 공원이라는 제법 규모가 큰 녹색의 정원이 펼쳐지는데, 야속하게도 비가 내렸다.
우리는 곧장 신주쿠로 이동했고, 애매한 날씨 덕분에(?) 다시 쇼핑의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달리 쇼핑의 주체가 달랐다. 오늘의 주인공은 우리 아가였다. 각종 스포츠 용품을 한곳에 모아둔 알펜 도쿄에도 들렀지만 거의 스쳐 지나갔고, 다시 유니클로에 들러 신생아를 위한 아기 옷을 골랐다. 그리고 이어서 GAP 매장의 베이비 코너에도 들어섰다.
아내는 옷걸이에 걸린 작은 옷들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손바닥만 한 상의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고, 바지를 펼쳐 보며 길이를 가늠했다. ‘이건 너무 작을까?’, ‘이건 계절이 맞을까?’ 같은 말들이 낮은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옷을 고르며, 아내는 이미 몇 개월 뒤의 시간을 앞서 걷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옷 하나를 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내의 얼굴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직 엄마 뱃속에서 콩알만 한 사랑이지만, 이 옷들이 입혀질 순간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있는 아내를 보며, 우리의 아이가 갑자기 아주 구체적인 존재로 다가왔다. 의류 매장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사랑이는 그렇게 처음으로 ‘미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돌아보면 첫날의 쇼핑은 분명 나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내가 먹고 싶었던 것, 내가 신고 싶었던 것, 내가 입고 싶었던 것들로 하루가 채워졌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를 기준으로 하루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여행의 중심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옮겨갈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아빠들은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 내 피를 이어받은 생명체가 이 세상에 나온다는 현실을 실감하는 데 엄마들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직접 아이를 품고 있는 것은 엄마이니까. 그럼에도 오늘 하루, 나는 뱃속의 아이와 꽤 깊은 유대감을 쌓은 것 같았다. 아직은 아빠 혼자서 만들어낸 일방향적인 유대감이지만, 이것은 분명 앞으로 우리가 함께 쌓아갈 관계의 기초가 될 것이다.
한 줄 정보
1. 임신 중에는 장시간 보행 시 피로가 쉽게 누적되므로 미술관·공원처럼 중간중간 앉아 쉴 수 있는 동선이 비교적 부담이 적다.
2. 국립·공공 미술관은 입장료가 저렴하면서도 전시 밀도가 높아 태교여행 일정에 효율적이다
3. 임신 중 문화예술 감상은 산모의 스트레스 완화와 정서적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들이 보고되어 있다.
4. 아기 옷이나 육아용품을 직접 보고 고르는 경험은, 특히 아버지에게 부모가 된다는 실감을 빠르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곤 한다.
5.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상상하며 물건을 고르는 시간은, 부모에게 미래를 미리 살아보는 감각을 선물한다.
6. 태교여행은 관광의 밀도보다 속도를 낮춘 체류 경험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