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교일기 #35] 최고의 하루

임신 24주 차, 결혼기념일

by Sylvan whisper

사랑이를 두 눈앞에 맞이하기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최고의 날’, ‘최고의 하루’는 언제가 될까? 역시나 사랑이 네가 태어나는 날일까? 너의 태동을 처음 느낀 날일까? 아니면 태교여행을 갔던 어느 하루일까? 아직 너를 기다리는 이 기간이 한창이지만, 감히 오늘이었다고 말해본다.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우리 가족이 둘이 아닌 셋이 되기 전, 사랑이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부가 둘이서만 보내는 마지막 결혼기념일이었던 것이다. 사랑이를 맞이하길 기다리는 이 기간 중 ‘최고의 날’이 엄마, 아빠가 오롯이 둘이서 보낸 하루였다는 것이, 나중에 사랑이 네가 섭섭할 수도 있으려나 싶지만 우리 가족이 ‘둘이 아닌 셋’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날은 무수히 많을 것이고 그만큼 우리 셋의 ‘최고’는 계속해서 갱신되어 갈 것이다.




우리의 ‘돈까스 로드’에 최종적으로 깃발을 꽂아 두고두고 간직할 수 있는 맛집을 하나 더할 수 있길 기대하며 결혼기념일 데이트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가보려고 찜해두었던 가게에서의 점심식사는 기대 이상의 만족을 느끼며 산뜻한 출발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는 이 가게로 인하여 여태까지 우리가 가본 돈까스 맛집 top 3의 순위가 바뀔만하다며 입을 모으면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종로를 자주 방문하는 우리였지만 북촌 한옥마을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아 몇 년이 지나고서야 오늘 처음으로 한옥마을을 쭉 가로질러 산책했다. 사실 별다른 정보도 없이 그냥 와본 것이었는데 시작부터 많은 인파로 북적이는 가파른 언덕을 만나 당황하기도 했다. 몸이 무거워지고 있는 아내였지만 그래도 오늘은 씩씩하게 힘을 내어 언덕길을 올랐고, 우리는 파란 하늘 아래 북촌 한옥마을의 풍경을 잠시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가 위치한 북촌 어딘가에서 산책을 마친 뒤 방문해 보려고 정해둔 삼청동의 한 카페는 지도상으로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지만 삼청동과 북촌 사이의 고도 차이는 생각보다 컸고, 우리가 가파른 언덕을 올라온 만큼 삼청동으로 넘어갈 때는 다시 경사가 급하고 좁은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언덕에 마주했을 때에 이어 두 번째로 당황을 했지만, 마치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듯한 그 골목길을 천천히 내려왔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모두 내려오니 순식간에 우리는 삼청동에 이르렀고, 아주 좁은 차도를 사이로 바로 맞은편에 우리가 봐둔 카페가 보였다.




카페는 음료와 달콤한 케이크의 맛도 좋았지만, 테라스 공간부터 통창으로 이루어진 카페 중간층까지 보자마자 탄성이 나올 정도로 맑은 햇살이 카페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2층 통창 밖으로는 카페에서 조성해 놓은 나무들이 배경을 만들어주고, 그 초록의 잎들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숲의 평화와 나른한 햇살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의 맑은 날씨, 쌀쌀하지도 덥지도 않은 오늘의 쾌적함을 만끽하기 위해 옥상 루프탑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 루프탑에 올라보니 우리가 지나쳐온 북촌 한옥마을의 언덕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쪽에서 바라보는 북촌의 언덕은 우리가 좋아하는 종로의 분위기를 닮아 있었다. 여의도나 강남의 인위적인 느낌의 고층 건물을 찾아볼 수 없는 곳, 한옥들은 언덕 반대편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관광지스러운 가옥들이 정렬된 분위기가 아니라 그저 오래된 서울의 골목길 같은 모습이었다. 낡은 간판들이 걸려 있고 오래된 교회의 십자가 하나가 우뚝 서 있는, 20~30년쯤 되어 보이는 낮은 건물들이 조금은 아슬하게 경사진 곳에 즐비하게 자리 잡은 풍경. 우리는 그 분위기가 좋아서 한참을 밖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페를 나서서는 아내가 발견했던 ‘Foto automatica’ 옛날식 인생네컷도 찍고 왔다. 언제 플래시가 터지며 셔터가 눌리는지 알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 화면에 보여 어떤 표정으로 찍힐지 다 아는 요즘의 카메라가 아니라 렌즈가 어디 있는지도 헷갈리는, 아무런 화면이 없는 좁디좁은 공간에서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미소를 지었다. 첫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해 눈이 동그랗게 떠진 모습이 사진에 담긴 채,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예상외로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나는 우리가 계속 방문 날짜를 미루고 있었던 사진전을 가는 것을 제안했다. 장소가 종로라 보고 나면 딱 맞게 저녁 시간이 될 것 같았고, 식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가면 알맞은 일정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수가 하나 나오지 않으면 섭섭한 법, 나는 전시관의 위치를 헷갈렸고 그곳은 종로가 아니라 서울역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이렇게 되니 남는 시간은 ‘여유’가 아니라 ‘애매함’이 되었는데, 우리는 이럴 바엔 차라리 남산도서관을 가기로 했다. 남산도서관은 이미 가봤기에 바로 옆의 백범공원을 걷기로 했고, 남산타워와 공원, 단풍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보며 사진도 실컷 찍었다. 그렇게 내려와 저녁식사를 하거나 귀가할 줄 알았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의외로 다시 사진전이었다.


평소라면 피로감 때문에 더 이상의 일정 진행보다는 데이트를 마무리했을 우리였다. 내 착각이 불러온 잠시의 모호함이 있었지만 빠르게 일정을 수정한 덕분에 물 흐르듯 하루를 이어갈 수 있었고, 시작부터 끝까지 방문한 모든 장소에서의 만족감이 기대 이상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체력을 아끼면서도 이상하게 하루를 더 잘 살아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보고 싶었지만 계속 미루고 있던 사진전은 예상보다 관람 시간이 짧았고, 그 점마저도 오히려 딱 들어맞았다. 전시가 길었다면 피로감으로 후회했을지도 모를 하루였기에, 적당히 마무리하고 싶어질 즈음 관람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데이트가 항상 오늘만 같다면, 우리의 외출이 항상 오늘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띄우며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하루 종일 걸었던 다리의 피로가 그제야 몸으로 올라왔다. 신발을 벗고 현관에 잠시 서서 숨을 고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늘 좋았다'는 말을 꺼냈다. 대단한 하루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일정이 완벽해서도,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 하루가 이대로 끝나도 아쉽지 않겠다는 느낌이었다. 씻고 나와 불을 낮춘 채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도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하루 동안 스쳐간 장면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북촌의 언덕, 햇살이 가득하던 카페, 플래시가 터지던 순간. 그렇게 하루는 조용히 정리되었다.




불을 끄기 전, 아내의 배 위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고 사랑이를 한 번 불러보았다. 오늘 하루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날이 있었다는 것만은 언젠가 꼭 말해주고 싶었다. 사랑이 네가 태어나기 전, 엄마와 아빠가 이렇게 둘로서 하루를 보내던 날이 있었다고. 너를 기다리면서도, 우리 자신을 잠시 놓치지 않았던 날이라고. 오늘은 너보다 우리가 아주 조금 앞서 있었던 날이었지만, 앞으로는 너와 함께 ‘최고’를 계속해서 다시 써 내려가게 되겠지.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우리 부부는 엄마, 아빠가 된다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지만 그만큼 큰 각오도 하고 있다. 밤잠을 설치고, 피곤한 몸으로 퇴근해도 사랑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늦잠을 자고 싶은 주말을 반납하고 아가와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게 될 것이다. 우리 둘 사이엔 항상 귀여운 꼬맹이가 엄마 손과 아빠 손을 잡은 채 꺄르륵 웃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란한 ‘가족’이 되어 있을 것이지만, 사랑하는 남녀로서 오직 서로에게 집중하는 ‘둘’로서의 순간은 분명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기억해두려 한다. 사랑이 네가 아직 우리 곁에 없던 날, 엄마와 아빠가 오롯이 둘로서 보낸 가장 단단하고 평온했던 하루로. 이 하루가 있었기에 우리는 조금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조금 더 좋은 엄마와 아빠로 너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줄 정보

1. 태교일기 하단, 정보 박스로 쓰기 딱 좋은 밀도야.

2. 임신 24주 차는 임신 6개월 후반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3. 이 시기부터 태동은 점점 규칙적이고 분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4. 산모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아빠도 태동을 손으로 느낄 수 있다.

5. 태아의 청각이 발달해 외부 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6. 산모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와 임신이 외형적으로도 드러나는 시기이다.

7. 태아는 이 시기부터 일정한 수면과 각성 리듬을 보이기 시작한다.

8. 부모가 태아를 ‘미래의 아이’가 아닌 ‘지금 존재하는 생명’으로 인식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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