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24주 차, 장인장모님의 방문
‘자기야, 가족회의!’
내일은 장인, 장모님께서 서울에 있는 우리의 집을 방문하시는 날이었다. 우리는 이날의 일정을 설계의 최종 마침표를 찍기 위해 전날 밤 식탁에 앉아 계획을 점검했다. 이번 일정은 우리가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 새롭게 꾸민 신혼집을 보러 오시는 의미도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어머님, 아버님의 ‘서울 방문’을 조금 더 꽉 채워드리고 싶었다. 서울에 오실 일이 거의 없으셨기 때문에, 아주 짧더라도 여행의 느낌을 낼 수 있었으면 했다. 장인장모님께 좋은 기억을 남겨드리고 싶은,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이 생겼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산’, ‘광화문’ 그리고 종로를 핵심 옵션으로 두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아침 일찍 먼 길을 오시니 피로하실 테고, 어머님의 체력 안배를 생각했을 때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 메인 코스는 한 가지로 정하자. 점심시간 즈음 도착하시니 서울역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점심식사 장소를 정하고, 그래, 그곳에서 덕수궁 돌담길이 바로 이어지니 시기에 맞춰 단풍 구경을 하면 되겠다. 광화문까지는 걸어서 이동할 수 있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최적화된 버스 노선은 00번. 이후 일정은 A안, B안으로 나누어 선택하실 수 있게 하자. 메인 일정을 마치고 나면 노량진 수산시장을 구경하고 저녁거리를 사 오면서 여의도 한강공원까지 둘러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동선일 것이다.
우리는 장소에서 장소로의 이동까지, 플랜 B까지 점검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 정했던 일정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얼마 전 결혼기념일에 다녀왔던 데이트 코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렇게 되니 우리의 ‘최고의 날’이었던 결혼기념일 데이트가 장인장모님을 맞이할 사전 답사가 된 셈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날’이 사전 답사가 되었다는 것은, 내일의 하루가 ‘최고의 확장’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음 날이 되었고, 나름 촘촘히 설계했던 덕분에 차질 없이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무난하고 속에 부담이 가지 않는 정도의 점심식사를 하고, 화창한 날씨 속에서 가을 단풍길을 산책했다. 이어지는 청계천과 광화문 광장을 지나, 우리가 결혼기념일 데이트 때 유독 마음에 들어 했던 카페로 향했다. 감사하게도 며칠 전까지 흐릿하던 날씨가 맑게 개어, 햇살을 느끼기 좋았던 카페의 분위기는 더욱 빛을 발했다. 장인장모님도 이날의 날씨에 몇 차례나 감탄을 표하셨는데, 아마 이 덕분에 덕수궁 산책길과 광화문 일대, 그리고 경복궁까지 걷는 일정이 한결 수월해졌던 듯하다. 덕수궁과는 또 다른 얼굴의 경복궁을 걸으며 우리는 담소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드렸다.
그렇게 걷는 동안 나는 배가 불러오는 아내는 물론 장인, 장모님의 걸음을 계속 살폈다. 체력이 조금씩 소진되고 있음은 느껴졌지만, 동시에 그것을 덮어주는 분명한 즐거움도 보였다. 엄청나게 특별한 경험들은 아니었을지라도, 우리는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길을 걸으며 안정감을 느꼈다. 청명한 날씨라는 운도 따라주었고, 별다른 변수도 생기지 않아 하루의 흐름은 무척 매끄러웠다. 무엇보다 서로가 각자의 만족감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우리는 이 하루가 잘 흘러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사랑이 덕에 오늘 하루가 이렇게 흘러간 거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마음은 묘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잘 모셨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고, 혹여 힘들지는 않으셨을지 불편한 점은 없으셨을지 하는 의구심도 잠시 스쳤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긴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그 의구심은 자연스레 접히고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
겉으로 보기엔 이날은 사랑이가 없는 하루였다. 하루의 계획은 분명 장인과 장모님을 중심으로 설계되었고, 그분들을 위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하루를 운영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내의 몸 상태를 살피는 순간에도, 동선을 줄이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도, ‘괜찮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모든 판단 속에 사랑이는 자연스럽게 함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어진 담소는 결국 ‘사랑이’를 중심으로 흘러갔고, ‘사랑이를 맞이할 우리’라는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장인과 장모님을 중심으로 하루를 설계하고, 그 계획을 하나씩 실행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가족’이라는 말의 반경이 넓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부부였던 우리가 부모를 품는 자리에 서 있었고, 그 자리는 곧 아이를 맞이할 자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확장되고 있었지만, 그 경계는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사랑이는 아직 눈앞에 없었지만, 이미 우리 가족 한가운데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날 우리는 사랑이를 데리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사랑이와 함께 하루를 살았다. 아마 오늘은 우리가 어떤 가족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느낀 날이었을 것이다.
한 줄 정보
1. 가족이라는 개념은 아이의 탄생을 계기로 ‘확장’되지만, 동시에 서로를 향한 배려로 더욱 '명확'해진다.
2. 임신은 부모와 조부모를 포함한 가족의 관계와 역할 인식 전반이 재설계되는 과정이다.
3. 태교는 특정한 행동이나 의식이 아니라, 하루의 속도와 기준이 달라지는 과정 그 자체일 수 있다.
4. 임신 중에는 아직 태아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산모의 컨디션과 태아를 고려한 선택들이 자연스럽게 가족의 하루를 바꿔 놓는다.
5. 태동이 느껴지기 시작한 만큼, 태아와 '가족'의 교감이 활발해지는 시기이다. 태아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에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산모의 스트레스에 태아도 불안함을 느낄 수 있다.
6. 아가의 콧구멍들이 열리고 코로도 호흡을 할 수 있다. 양수를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호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