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25주차, 버킷리스트
그동안의 이 ‘태교일기’는 남편인 나의 시각에서 바라본 산모 아내와 뱃속의 아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써보고 싶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오롯이 ‘남편’ 중심의 내 이야기이다. 임신이라는 커다란 사건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올해가 시작되며 나는 버킷리스트를 정리했다.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써 내려갔는데, 욕심이 많은 탓에 그 목록은 꽤 길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은 ‘러닝’과 ‘글쓰기’였다. 러닝은 올해 누적 1000km를 채우는 것. 글쓰기는 출판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의 형태를 갖춘 하나의 결과물을 완성해보는 것. 이 목표들은 단순히 하루 이틀의 결심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달 100km씩 달리고, 10km 마라톤, 하프마라톤 대회에 나가고, 점점 거리를 늘려가야 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고,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이야기들을 시리즈로 묶어, 일주일에 한 편씩 완성해 나가야 했다. 조금씩, 정말 조금씩 단계를 밟아가며 나는 목표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12월보다 한 달 앞선 11월, 그 두 목표를 동시에 이루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간이었다.
브런치북 시리즈의 마지막 글을 예약 발행해두고, 나는 집 앞 공원으로 마지막 러닝을 하러 나갔다. 1000km를 채우는 10km의 달리기. 1년 가까이 쌓여온 시간의 마지막 구간이었다. 나는 이 두 목표를 위해 ‘시간’을 투자했고, 그 시간을 ‘루틴’으로 만들었다. 달리는 일과 쓰는 일이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하루의 일부가 되었을 때, 비로소 목표는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목표를 달성한 순간은 극적이지 않았다. 숨을 고르며 러닝 앱을 확인했을 때도, 특별한 환희가 밀려오진 않았다. 나는 그저 조용히, 숨을 고르듯 차분하게 스스로를 자축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나가보니 아내가 작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그 안에는 조각 케이크와 간단한 간식이 담겨 있었다. 아내는 내 목표 달성을 축하해주기 위해 준비해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 내가 두 가지 목표를 완성한 날이라는 것을 깨닫게된 순간이었다. 1000km를 채운 날이자, 브런치북 한 권을 완성한 날이라는 것을.
나는 러닝만 의식하고 있었고, 글쓰기의 마침표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내가 그것을 짚어준 것이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했다. 목표를 이뤘다는 감정보다, 나의 시간을 누군가가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나는 올해 내내 마음 한켠이 조금 불편했다. 이 활동들이 지나치게 ‘나’ 중심적이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임신한 아내가 집에 있는데, 나는 매일 한 시간씩 달리러 나갔고, 돌아와서는 이어폰을 꽂고 글을 썼다. 혹시 내가 너무 나에게만 몰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시간을 나에게 써도 되는걸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하고 싶어서’ 하던 일들이, 어느 순간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나는 이제 한 가족을 책임질 사람이 될 것이었다. 아이를 안고, 업고, 뛰어다니고, 밤을 새워야 할 사람이었다. 그 모든 것의 기반은 체력이니까. 그래서 러닝을 단순한 거리 채우기가 아니라 체력을 기르는 훈련으로 바꾸었다. 기록을 줄이기보다, 오래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글쓰기 역시 달라졌다. 태교일기를 쓰면서 나는 처음으로 ‘책임이 담긴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사랑이의 기억에는 남지 않을 이 시간을 대신 기록해주는 일. 읽기를 좋아하는 아빠, 생각을 남길 줄 아는 아빠가 되고 싶었다.
사랑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나의 세계는 내 취미와 목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목표를 이룬 날이 아니라 ‘가장이 되어가는 나’를 인정받은 날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내가 내게 건넨 작은 케이크는 단순한 축하가 아니었다. 그건 나의 시간을 존중해준다는 신호였고, 내가 기울인 노력과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 덕분에 나의 버킷리스트는 그저 줄 하나 긋는 개인적인 성취가 아니라 우리 가족 안에서 공유되는 ‘성과’가 되었다.
임신 기간은 분명 산모와 태아가 주인공인 시간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가족이다. 서로의 노력을 존중하고,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각자의 자리를 인정해주는 관계. 나는 오늘, 그 지지를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그 지지 위에서 비로소 ‘우리’라는 이름이 단단해졌다고 느꼈다. 임신 기간의 진짜 주인공은 엄마도, 아빠도, 태아도 아닌 ‘가족’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인정과 지지가 있을 때 가족은 비로소 완성된다.
한 줄 정보
1. 임신 25주차, 태아의 청각이 더욱 발달해 엄마·아빠의 목소리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2. 태동이 비교적 규칙적으로 느껴지며, 아빠도 손으로 감지할 확률이 높아진다.
3. 자궁이 배꼽 위까지 올라오며 배의 크기가 눈에 띄게 드러나는 시기.
4. 산모는 철분 요구량이 증가하여 빈혈 관리가 중요한 시기이다.
5. 배가 커지며 수면 자세(옆으로 눕기)에 더욱 신경써야하는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