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29주차, 크리스마스 마켓
아내가 전부터 가고 싶다고 말해두었던 ‘크리스마스 마켓’은 잠실 롯데타워 앞에서 열리고 있었다. 티켓팅도 미리 해두었고, 거대한 트리는 저녁이 되자 본격적으로 빛을 발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트리 위에서 비눗방울이 흩날렸고, 조명에 반사된 그 방울들은 마치 눈이 오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아이들은 손을 뻗어 방울을 잡으려 했다.
팝업 스토어마다 반짝이는 오너먼트와 크리스마스 소품들이 가득했고, 길게 늘어선 푸드 부스에서는 따뜻한 음식 냄새가 흘러나왔다. 회전목마는 천천히 돌고 있었고, 우리는 트리를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조명은 충분히 낭만적이었고, 그 풍경 안에 선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평화로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낭만으로만 채워진 날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할 수 있도록 롯데타워 내부에 인화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줄은 10명 남짓이었지만, 한 사람당 인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줄이 짧다고 안심했던 마음은 금세 사라졌다. 대기 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임산부인 아내가 계속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표정은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 ‘괜찮다’가 온전히 믿기지 않았다.
저녁식사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의 롯데타워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한 시간의 웨이팅은 기본이었다. 기다림이 반복될수록 우리의 인내심은 조금씩 얇아졌다.
사실 이날은 나에게도 쉽지 않은 날이었다. 지난 1~2주 동안 유난히 바빴고, 잠이 충분하지 않았다. 마켓에 가기 전 아무 생각 없이 나갔던 러닝에서는 현기증이 느껴졌다. 목표로 삼았던 거리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몸은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사랑이가 쓸 기저귀 갈이대를 당근거래하러 또 나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친한 후배의 결혼식 사회를 맡은 날이었다. 대본을 다시 정리하고 멘트를 숙지해야 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집중하려 애썼고, 집 근처 PC방에서 대본을 인쇄해 돌아오니 새벽 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다음 날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몸을 던졌을 때, 나는 그대로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그제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편두통이 밀려왔고, 몸이 뒤늦게 하루의 무게를 인정하는 듯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아내와 함께 서 있을 때는 그 피로가 잘 느껴지지 않았던 듯 했다.
엄청난 인파 속에 임산부 아내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온 신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임산부는 걸음이 느리고, 중심을 잡는 것도 조심스럽다. 사람이 몰리는 장소에서는 앞뒤에서 밀리는 순간이 잠시라도 발생한다면 위험이 될 수 있다. 그 압력이 어느 정도일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누군가 부딪히지 않을지, 갑자기 밀리지 않을지. 그 순간만큼은 내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놓치면 안 된다’는 감각만 또렷했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기 보다, 그런 생각을 할 새가 없었다는 말이 정확할 듯 하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긴 기다림과 붐비는 공간 속에서 분명 피로했을 텐데, “괜찮아”라고 말하며 자신의 불편함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 또한 자신의 피로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의식하지 못한 채 아내를 위해 버티고 있었고, 아내는 자신의 고단함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임산부라면 어떨까. 출퇴근 시간대의 빠른 속도와 밀도 속에서, 그 인파를 온몸으로 버텨내야 한다면. 그 상황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날의 기다림과 혼잡함, 그리고 내 몸의 피로까지 겹치면서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임산부에게 기다림과 혼란은 쥐약이다. 그 어려움의 강도는 두 배, 세 배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
크리스마스의 불빛은 화려했지만, 그날 우리가 배운 건 조금 더 현실적인 것이었다. 아름다운 풍경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얼마나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또렷하게 느꼈다.
이제 나는 단순히 함께 걷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걷는 사람이 내가 지켜야 할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한 줄 정보
1. 임산부에게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혼잡한 공간은 비단 대형쇼핑몰, 축제와 같은 현장 뿐만이 아니다. 대중교통, 엘리베이터 등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다.
2. 임산부는 중심 변화로 인해 균형 감각이 저하되어 인파 밀집 상황에서 사고 위험이 증가한다.
3. 장시간 대기는 하지 부종과 피로 누적을 유발할 수 있어 중간중간 휴식이 중요하다.
4. 보호 본능은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강화되며, 아이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향한 마음도 배우게 된다.
5. 서로의 피로를 드러내지 않고 버티는 순간들이 부부를 부모로 만든다.
6. 아기는 청각이 더욱 발달해 외부 소리에 반응하며, 산모는 배의 무게로 허리 통증과 피로를 쉽게 느끼는 시기이다.
7. 태동이 강해지고 수면의 질이 떨어지기 쉬워, 산모는 피로감이 더욱 쉽게느껴지고 피로누적의 여파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