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29주차, 체력 방전
'자기야, 나 오늘은 진짜 쉰다!'
어제 저녁, 초저녁부터 쓰러져 잔 탓에, 한 번의 눈 깜빡임으로 하룻밤이 훌쩍 지나갈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 길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깨어 아침, 나는 아내에게 선언에 가까운 말을 전한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기도 했고, 아내가 나를 걱정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이를 미리 잠재우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으이그 내가 잠 좀 자라고 했지!?'
최근 몇 주는 솔직히 무리였다. 밤에는 일을 정리하고, 새벽에는 공부를 붙잡았다. 중간중간 운동도 놓치지 않겠다고 러닝화를 신고 나갔다. 몸이 가볍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도 '이 정도는 이겨내야 체력이 늘지' 하고 스스로를 밀어붙였다.
어제 결혼식 사회를 맡았던 날이 정점이었다. 마이크를 잡고 서 있는 동안엔 멀쩡했다. 목소리는 안정적이었고, 농담도 타이밍에 맞게 나갔다. 사람들은 웃었고, 후배는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부터, 아니 결혼식이 다 끝나고 연회장에서 식사를 할때부터 머리가 묵직했다. 지끈거리는 편두통, 관자놀이가 조여오는 듯한 느낌이 났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의 옷은 던져버리듯 벗어놓고 소파에 기대 앉아 그대로 누워버렸다. ‘잠깐만 눈 붙이자’는 생각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 있었다. 몸이 아니라, 전원이 꺼졌던 거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어제 배터리가 '0'이 되어 전원이 꺼지듯 잠에 빠진 덕분에(?) 아마 10시간은 족히 통으로 잠들었을 것이다. 오전에 잠에서 깨어났을땐, 그래도 그동안 부족했던 잠이 보충 되었기 때문에 잠시 동안은 어제보단 정신이 맑은 느낌이 났다. 그렇지만 그동안의 누적된 피로를 한 번의 잠으로 덮어버릴 순 없는 법, 충분히 잠은 잤다는 느낌이 들었어도 팔과 다리는 무겁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지질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쉰다. 이건 아내의 걱정을 잠재우기 위한 말이기도 했지만, 종종 이런 패턴의 하루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은 나이기에 본능적으로 알았다. 오늘은 무조건적인 휴식이 필요한 날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은 침대에서는 일어났지만, 소파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나는 원래 멈춰 있는 걸 잘 못 견디는 사람이다. 눈앞에 목표가 없으면 괜히 불안해지고, 해야 할 일을 만들어서라도 움직여야 마음이 놓였다. 일정이 비어 있으면 채워 넣었고, 하루가 느슨해 보이면 스스로를 다그쳤다. 가만히 있는 시간은 나태로 느껴졌고, 쉬는 날조차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나에게 쉼은 멈춤이 아니라, 다음 도약을 위한 준비 과정이어야 했다.
때문에 나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나날이 많았고, 그렇기에 '방전' 되버리는 날도 많이 겪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서 또한 나는 본능적으로 내 체력 상태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알았고, 오늘이 어떤 날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나는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머릿속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 달 자산 배분은 괜찮은가.’
‘아내 포트폴리오 리밸런싱은 미뤄둔 게 있었지.’
‘사랑이 계좌 구조는 좀 더 정리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결국 나는 몸을 일으켰다. 노트북을 켜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부팅 화면이 지나가고, 익숙한 템플릿을 열었다. 가계부 시트, 투자 현황 정리표, 연간 자산 추이 그래프. 숫자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나는 항목을 하나씩 다시 정렬했다.
월 고정지출을 점검하고, 현금 비중을 계산했다. 아내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성격별 보유 비중, 구성을 확인하고, 내 포트폴리오와 성격이 중복되는 자산을 체크했다. 셀 하나를 수정하면 그래프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사실 나에겐 그런 수치와 그래프, 묘한 그 움직임까지도 이상하게 안심을 줬다. 내가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래를 조금이라도 당겨와 붙잡고 있다는 감각.
이렇게 나는 우리 집 재무 상황의 청사진, 그리고 그 청사진의 밑바탕이 되는 가계부의 정리까지 이어나가고 있었다.
'자기! 오늘 쉰다며?'
나는 대답 대신 머쓱한 미소를 짓고 마우스를 한 번 더 움직였다. 아내가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발 좀 쉬어, 자기도 이제 나이 생각해야된다?'
이 패턴이 비록 나를 갉아먹는 일일지라도, 내가 내 가족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집’을 만들고, 사랑이의 미래를 준비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다져두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다른 걱정도 들게 되는건 어쩔 수 없다. '자기가 먼저 쓰러지면 우리 아무 의미 없어' 아내가 혹시나 이런 불안을 안고 있는건 아닐까?하는 걱정 말이다. 이런 '우리'의 과정에서 내가 먼저 닳아버리면, 그 설계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길을 잃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야트막하게 따라온다.
나는 내 성향을 무기라고 생각해왔다. 계속해서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고, 미루지 않는 사람. 그 덕에 여기까지 왔다고 믿는다. 그런데 가끔은 그 무기가 나를 베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쉬지 못하는 습관, 멈추지 못하는 불안. 오늘 나는 쉰다고 말했지만, 결국 또 숫자를 만졌다.
어쩌면 진짜 책임은 더 오래 버티는 게 아니라 제때 멈추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완전히 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 속도를 돌아보는 하루였다고 말해두고 싶다.
한 줄 정보
1. 임신 29주차, 아기의 체중은 약 1.2~1.4kg 정도까지 증가했으며 이때부터 태아의 몸무게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2. 수면 자세는 왼쪽으로 눕는 자세가 혈류 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배뭉침(브락스톤 힉스 수축)이 불규칙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통증·주기성 동반 시 병원 상담이 필요하다.
4. 태아는 눈동자가 완성되어 '시각'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5. 이제 임신 중반을 넘어섰다. 산부인과의 정기 검진은 그 간격이 2주로 전환된다.
6. 자궁경부에서 나오는 분비물들이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며, 이 시기부터 양수가 샐 수 있다.
7. 때문에 다른 분비물로 혼동하여 양수가 새는 것을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는데, 양수가 샌다면 꼭 병원의 검진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