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태교일기 #1]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9주차, 임신소식

by Sylvan whisper

어제는 잔뜩 성을 냈다. 우리도 전형적인 싸움 패턴을 보이는 부부였고, 어제의 싸움도 평소의 싸움과 비슷한 주제, 비슷한 양상, 비슷한 결말이었다. 아내는 눈물을, 나는 새어 나오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전형적인 싸움을 반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시 비슷한 패턴의 화해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이 그저 반복되기만 한다는 것은, 내가 이 관계를 대하는 방식에 발전이 없는 것인지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머리를 비워보겠다고 열대야 속에서 러닝을 하러 나갔다. 덕분에 들숨날숨은 뜨겁고 축축했고, 땀은 비 오듯 흘러 젖는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티셔츠와 바지는 무거워져 갔다. 누가 러닝이 머리를 비우기 좋은 행위라고 했던가. 나는 비난이나 포기, 짜증과 같은 감정들을 떠올리며 달렸다. 그게 나를 금방 지치게 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늦은 저녁과 함께 소주를 마셨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각자 잠을 맞이했다. 보통이면 술기운에 바로 잠에 들 텐데, 나는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어둠 속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커리어, 재정상황, 내 꿈, 그리고 또한 결혼생활 그게 뭐든 나는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성공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다만 그 성공이라는 걸 오히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해 보자면, 나는 ‘만족’ 할 줄 알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 문득 깨달아버렸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무엇도 성공하지 못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커리어를 쌓지도, 떵떵거리지는 못하더라도 부족하다고 느낄 새가 없는 통장잔고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 누구든 당당하게 저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되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행복하게 갸륵한 미소를 띄우며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마 하나라도 만족했다면 '그래 내겐 이게 있지..' 라며 눈물이 흐르진 않았을 터였다. 어둑한 밤을 보냈다.


내 타고난 못된 성미 때문에, 어제는 아내를 안아주지 못했고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슬금슬금 말을 걸고, 분위기를 풀어 봐야지. 조금씩 말을 걸었다. 일단을 대화를 터야지. 분위기가 풀리면 다시 사과와 함께 안아줘야겠다. 쓰레기를 버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아내가 쉴 수 있게, 잠시 쉬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다시 웃으며 대화해야지. 다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만족에 다가갈 계획을 세웠다.




아내가 두줄의 임신테스트기를 보여준 것은 그때였다. 아.. 하필! 우리의 소중한 비밀을 공유하기 직전에, 나는 싸워버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웃음이 나왔다. 사실 이 웃음의 의미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자녀계획과 시기가 달랐고, 그녀의 복직시기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재정적인 부분도 걱정이 된다고 했다. 늦게 알아버려서 약을 먹은 적도, 적지만 술을 마신 적도 있고, 격한 운동도 했다.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던 걸까? 아내는 수많은 요소들이 떠오르는 혼란으로 인해 눈물을 흘렸던 것이었다. 이 소중한 비밀에 대한 고백의 순간에 아내가 가장 많이 내뱉은 말은, 나에게 이 이야길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는 말이었다.

‘우리의’ 자녀계획 시기와 달랐으니까.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게 우리가 처음 아이를 맞이한 솔직한 감정이었다. 혼란이라고 정의해야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어떤 감정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니까.




나는 상투적일지도 모르지만 아내를 달래기 위한 말들을 내뱉었다. ‘이제는 미래만 생각하면 돼’, ‘좋은 일이야, 시기가 아주 조금만 당겨졌을 뿐이야’, ‘우린 잘 해낼 수 있어’ 그리고 내뱉지 못한 말들을 떠올렸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계획보다 이르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나는 이 두줄의 임신테스트기, 우리의 소중한 비밀을 알게 되기 불과 12시간 전에, 패배감에 질질 짜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먼 훗날 우린 이날을 웃으면서 회상하겠지. 그만큼 무언가 무너질 만큼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오히려 축복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라는 것이 바로 이 일의 정체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 순간을 행복에 겨운 충만한 순간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은 아마 내겐 당분간 큰 회한으로 남을 것이다. 그게 또 다른 내 삶의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가, 그리고 내 짝꿍에게, 이 행복에 겨워야 할 순간에 채워주지 못한 ‘행복’, 이 행복은 앞으로 내 모든 노력을 다해서 배로 갚아줄게.



한줄 정보

1. 우리가 흔히 아는 임신증상인 '입덧'은 임신 초기에 찾아온다. 때문에 이러한 증상이 적은 산모라면 임신사실을 빨리 못알아차릴 수 있다.

2. 생각보다 남편에게 임신사실을 먼저 알리는 산모는 드물다. 그리고 꽤 많은 경우가 기쁜 마음만 가진 채 알리지 못할 수 있다.

3. 임신사실에 대한 당황스러움이나 막연한 두려움으로 자신보다 먼저 출산, 임신을 겪은 친구들에게 가장 먼저 연락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4. 임신테스트기는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요즘 임신테스트기는 확률이 99%에 이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