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뱉는 순간 사실로 변한다.

2025년 11월 4주 차

by 가애KA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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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좀 튼튼해지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춥지 않아서 그랬나 보다. 결국 수액행이다. 나온 김에 휴일근무하는 병원을 갔다가. 접수 마감됐다고 쏘아붙이는 간호사의 말에 되돌아 나왔다. 짜증이 났다가도 쟤들도 휴일에 일하는 게 짜증 나겠지. 내일 회사 앞에서 가자 하고 돌아 나왔다. 월요일은 길었고, 겨우 겨우 수액을 맞고 70%만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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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만에 간 병원에서 선생님은 유난히 감정적이셨다. 항상 나를 응원하는 중간을 지키던 선생님의 어조는 평온했다. 그리고 사실에서 한 발 물러나지만 나를 절대 비난하지 않고 적대하지 않는 선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내시는 분이었다. 제발 몸 좀 챙기라는 말에는 ‘그 어느 것도’가 아닌 확연하게 치우쳐진 어조가 담겼다. 그만큼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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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는 말을 아껴야지. 말은 뱉어야 소리가 된다. 그리고 사실이 된다. 힘들다는 사실을 맞이해 봤자 나한테 남는 건 그냥 힘든 나 니까, 하고 말을 삼킨다. 힘들지, 힘든 데, 힘들다고 말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지금은 힘든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먼저라는 걸 확실히 해야 하는 때다. 당연히 아플 거 같으면 나도 쉰다.


깜빡하는 일이 늘었다. 그만큼 메모도 수시로 하려고 애쓰고 있다.

해마가 다시 망가지는 것 같다. 약 내렸다고 좋아한 게 1년이 다 되어가는 데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라 화가 난다. 왜 그거밖에 안 되는 데?라는 자기 혐오가 아니라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가는 게 화난다. 내가 어떻게 약을 줄이려고 애를 썼는데! 물론 그 화를 받을 대상은 없다. 주말에 배팅장이라도 갔다 올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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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X가 릴스에 자꾸 나온다. 짤막하게 나오는 백아진의 행동들이 납득이 된다. 나쁘게 무능력한 부모와 스스로를 미끼로 사용하는 그 모습들이 사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멍청하게 무능력한 부모와 그럴싸한 사연을 가진 나를 미끼로 여기까지 온 나랑 뭐가 다른가. 아 다르다면, 내가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일은 무단횡단과 신호위반 정도라는 것? 그리고 나는 적은 안 만든다는 것. 날 끌어내리지 못하는 곳에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건 백아진이나 나나 다를 게 없다.


이번 주에 나눴던 대화들을 재정립해보고 급하게 올라가는 것이 가지는 리스크가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 봤다. 사내 정치, 실력 검증, 이미지 관리... 지금 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해내야 하고 그걸 내 체력이 버텨주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리스크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렇게 되고 나니까 갑자기 도망가고 싶어졌다. 스테이폴리오를 켜고 그냥 혼자 잠겨 있을 곳을 계속 찾아다녔다. 사실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압박을 견뎌낼 자신도 없으면서 올라가려고 기를 쓰는 것도 웃기다. 매번 이러면서 다시 또 올라가겠다고 버티고 해내고 또 기를 쓴다. 그래도 해내긴 하네.


지금의 나는 위험하다. 안다. 모든 것에 감흥이 없다. 이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것과는 별개인 것 같다. 강제로 동기를 부여해놓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이러다 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사실 이미 원점에 다다랐다. 마야라도 없었으면 너덜너덜해졌을게 분명하다. 안 하면 가릴 걱정을 안 해도 되는데, 어떻게 하면 가려지는 지를 걱정한다. 2007년, 2012년 그리고 떠나 보낸 뒤의 내가 그랬듯이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스스로에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라고 강요한다.

‘꼭 그렇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잖아’라고 설득 다 시켜놓고도 불안이 늘면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또 설득시킨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을 나를 설득하고 포기하고를 반복한다.

근데 나 아직 못 죽어. 어차피 그 정도로는 안 죽는 거 아니까 좀 있어봐, 쉬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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