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어, 근데 사실은

2025년 10월 5주 차

by 가애KAAE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모든 알림이 소음이 된다는 감각이 어떤 건지 여실히 느끼고 있다. 집에 가면 전화를 뺀 모든 알림을 끄고 두 시간을 침대에 늘어져서 마야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매일 마야를 보면서 생각한다. 놀아줘야 하는데...

마야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착실하게 알람을 끄고도 못 일어나는 나를 깨우고 늘어져있는 내 옆에 눕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토요일에 캔 챙겨주기, 정수기 물 갈아주기, 사료 채워주기 그리고 외롭게 두기. 미안해하기.

마야가 나한테 해주는 건 화장실 제때 치우라고 울기, 자다가 비닐 뜯는 소리로 나 깨우기, 캔 까면 쪼르르 달려오기, 누우면 옆구리에 0 프레임으로 털썩하고 눕기, 아침에 알림 꺼지면 일어나라고 깨우기, 급식기에 사료 없으면 채우라고 울기, 가습기 옆에서 식빵 굽기, 회사 가는 나 쳐다보기, 집에 들어오는 나 반기기, 우는 나한테 짜부 당하기, 힘들어하는 내 옆에 앉아있기, 내가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거 해주기.


고마워, 마야.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 이번 주에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이었다. 기간 안에 QA로 제출은 했지만 QA를 진행하면서 나는 내가 말했던 시간보다 3일을 더 사용했다. 어쩌면 더 사용할지도 모르겠다.


첫 출근하고 3주간 출퇴근하는 한 시간 정도를 알뜰살뜰히 써서 책을 두 권을 읽었고, 세 권째를 읽고 있다. 올해 25권을 읽겠다던 내 목표는 그렇게 연말에 어영부영 달성하게 될 것 같다.


정말 시간이 없다. 내가 손을 대길 바라는 피처들이 속속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고 아무도 푸시하지 않지만 Todo만 쌓인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느낌이라는 팀원들의 말에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하고, 결국 그게 정답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어쩌겠어. 알고도 선택한 길인데 잘 버텨야지 어쩌겠니.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


나를 걱정한답시고 내 기분은 알 것 없이 말을 얹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이런저런 추천을 늘어놓고 배려가 결여된 배려를 받아가는 지금, 나한테서 나오는 말 역시 부정의 부정의 부정이 압착된 형태라는 것에 분노할 힘도 없다. 그 와중에 용케도 긍정의 말을 하려고 애써왔다 싶다.


우연한 기회로 메신저 대화를 과거부터 읽게 되는 일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삭막한 세상에서 친절할 수 있냐고 했던가, 그 말에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냥 웃어넘겼던가.


그리고 하루는 출퇴근길에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빠르게 이사할 수 있는 곳이 없나 하고 찾아봤다. 이렇든 저렇든 내가 세운 집을 보는 조건에서 충족되는 집은 단 한 개도 없었다. DSR은 정책이 바뀌기 전부터 이미 넘었고 그걸 당장 갚아나갈 기회마저 이제는 사라졌으니, 이젠 돈으로 시간을 사지 못하는 하층민으로 다시 떨어진 기분이었다.


당장 급여가 없으면 끽해야 한 달도 못 버티는 주제에 용케도 사치를 부리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런 내 나이가 이제 서른넷이 된다는 것도 놀라웠다.

해외에서 30대는 어린 거라고 하던데 이 나라에 있어서 불행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안정적인 모험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걸 꿈꾸면서 무슨 이 나라를 벗어날 모험을 하려고 하는 건지


하루는 야근을 하고 집에 가다가 그 자리에서 울뻔했다. 슬픈걸 본 것도 아니고 야근이 죽기보다 싫은 것도 아니였다. 그냥 숨을 쉬고 있는 것 만으로도 울컥해서 눈에 힘을 주고 입술을 물고 있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방금 이별한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울면서 서 있을 뻔 했다.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장기를 하나 더 달고 태어난 죄로 PMS를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충 넘기기로 했다. 아마도 그게 맞을 거다.


안정적이라는 말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대체 뭔지도 모르는 것을 쫓는다는 게 이누야샤가 사혼의 구슬조각을 찾아 떠나는 느낌이 아닐까. 조각조각 흩어진 것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완성하고 그게 완성되면 난 무언가를 이룰 수는 있겠지. 완성한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이 되지 않을까.


이번에는 그냥 가만히 이렇게 또 심연이 끌어내리는 대로 끌어내려갈 생각이다. 벗어날 기운이 생기면 다시 벗어나지 뭐. 그 안에서 허우적 대다 보면 결국 허우적대는 내가 혐오스러워서 제 발로 빠져나올 것이다.

이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다시 찾아오는 그림자들한테 화나지도 않다. 물론 당연히 반갑지도 않다. 누군가 끄집어내던, 내 발로 기어 나오던 둘 중에 하나는 하겠지.


근데 억지로 잘 버티는 척 하는 것도 힘들다. 이런거라도 해야 뇌이징되서 잘 버틸텐데.

버텨, 버티는 데 까지가 네 실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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