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모리
뇌경색이 재발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다시 안 올 것만 같았던 그 시간을 함께 아빠와 보내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가족에게는 아빠의 생명을 연장받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아빠가 낙상했을 때 제발 무사하기만을 바랬다.
간절히 기도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나와 통화하고 안부를 주고받던 아빠가 의식불명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했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이들을 엄마에게 맡기고 내가 주보호자로 아빠를 간병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도 했다.
심방세동이 있을 만큼 부정맥이 있었는데 왜 아빠는 말하지 않았을까?
인지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나는 왜 아빠를 한 번도 모시고 병원에 가지 않았을까? 라는 자책과 후회가 가득했다.
아픈 아빠에게 아이들을 맡겼던 것. 등원 정도였지만 아빠가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좋아하던 술도 안 드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혹시라도 술 마시면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까 봐
우리 아이들을 봐주러 오는 날에는 늘 그랬다.
매일 아이들을 위해 가져왔던 간식들, 딸과 사위 손주들을 먹이려고 가져왔던 반찬을 기억한다.
작년 연말로 돌아가서 아빠를 혹시 내가 입원시켰더라면 병실 배정에 대해 컴플레인을 할 수 있었을까?
간병인을 쓰게 해달라고 할 수 있었을까? 등등
입원 후 48시간도 안되어 일어났던 낙상을 막을 수 있었던 방법이 없었을까?
머릿속으로는 수 천 번도 더 생각했다.
응급실에 가는 당일에도 아빠는 우리 아이들을 봐주셨었다. 그때 나는 볼 일이 있어서 서울에 갔다 와야 하는일이 있었고
그래서 아이들을 저녁까지 맡기게 됐다.
그게 아빠에게는 무리가 됐던 걸까?라는 별별 생각을 다했던 것 같다.
나 때문에 아빠가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평소 아빠가 술을 자주 드셨던 것. 규칙적이지 않은 생활습관이 원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낙상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뇌부종. 의식저하, 수술, 중환자실 등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아빠는 생사를 넘나드는 듯했다.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보호자 입장에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좋아져서 의식이 깨어나길, 의식이 깨어나면 조금씩 몸이 회복되어서
갖고 있는 배액관들을 하나씩 제거하기를, 다시 걸을 수 있기를.
일상을 회복하기를 등등 점점 더 소망하는 것이 더 많아졌다.
아빠가 깨어났을 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좋아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로 복시, 어지러움으로 인한 구토로 경관식도 잘 먹지 못했다.
하루 2~3번은 구토를 했었다. 걷기 위해서는 재활을 해야 하는데 관절염으로 우측 발목에 물이 차서
기립기나 걷는 운동 자체를 할 수 없는 날도 많았다.
동생과는 장기전이다. 1년 정도는 치료하면서 경과를 보자는 말을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6개월 정도 지나고 지금은 10개월 차에 접어들었는데
강직이 없다. 강직이 심한 사람들은 몸이 뒤틀린다거나 팔이나 다리 쪽에 편마비가 와서
힘이 빠진다. 이 점이 너무 감사하다.
보행도 많이 좋아졌다. 아직까지는 불완전해서 경사가높은 곳은 못 걷겠다고 한다.
그럼에도 두 발로 서서 화장실을 다니는 것에 감사한다. 동생과 나는 아빠가 그동안 본인 하고 싶은 대로 살아서, 규칙적이지 않은 생활 습관 등등
술 좋아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다녔던 것들 등등에 대해서 그래서 아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빠 진짜 철없다고. 이번에 좋아지고 나서도 술 마신다면 정말 아빠도 아니야(?)라는 말을 했었다.
실제로 우리는 아빠에게 두 번 다시 술을 마시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이번에 쓰러지면 다음에는 살아있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이다.
아빠는 이번에는 정말 크게 충격을 받으셨는지(본인의몸상태에 대해) 스스로의 건강에 자신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우리는 아빠가 그 특별한 경험을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잊지 않고 소중히 삶을 대해주었으면 했다.
© by_syeoni, 출처 Unsplash
이번에 뇌경색 재발을 진단받으면서 언젠가는 엄마도 아빠도 돌아가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현실적인 대비란 보험이나 마음의 준비, 케어 등을 의미한다.
당시 아빠는 생명보험도 해지한 상태였다. 아빠 이름으로 된 보험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실비는 20년 전 발병한 뇌경색으로 아예 가입을 하지 않았다. 요즘은 종합 보험 형식에 필요한 보장내역을 설계할 수 있어서 혈관 계통으로 방어를 해 놓으면 좋다. 심장혈관, 뇌혈관 위주로 설계하면 웬만한 질환은 방어할 수 있다. 보통 돈이 많이 드는 질환이 이런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여기에 50종 수술비 골절 등도 포함되는 영역도 추가했다.
그렇게 아빠가 아프고 나서야 우리는 보험을 점검했다. 엄마까지 혹시 아플까 봐 암보험, 혈관 질환 종합보험을 가입했다. 시부모님, 남편, 나, 아이들 보험도 점검했다. 거기서 필요 없는 보장은 빼고 필요한 내용은 더 보강했다. 해지하고 다시 가입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시부모님 보험을 가입해 드렸는데 아버님이 눈수술, 내시경을 해서 보험금을 지급받기도 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는 역시 보험 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보호자들이 가장 많이 흔들리는 게 비용이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지켜보면서, 그리고 실제로 아빠가 재발하고 나서 보호자로 있어보니까 느끼는 점이다.
뇌경색은 언제, 어느 정도까지 좋아질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인 것 같다.
재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 또 처음부터 독립생활을 할 수 없으니 간병비가 만만치 않다.
사실 병원비보다 개인 간병비가 더 비싸다. 제법 돈이 있는 집이 아닌 보통의 가정이라면 부담스럽다.
개인간병은 환자 중증도에 따라 11~13만 원부터 시작한다. 1주일만 써도 돈 100만 원이 쉽게 나간다.
이런 부분을 대비하는 치매. 간병비 보험이라는 것도 있다. 치매나 뇌혈관 질환이 없는 상태에서 가입하는 게 좋고, 뇌혈관 질환이 있을 경우 발병일로부터 5년이 지나야 가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아빠는 가입하지 못했다. 65세 이전에 가입하면 좋은 것 같다. 나중에 엄마도 가입시켜드리려고 한다.
이번에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정말 힘들 때 가족만이 곁에 있다는 점을 몸소 체험했다.
각자 가정이 있음에도 한걸음에 아빠가 가장 아팠을 때 간병해 주신 고모들.
만약 동생이 없었으면 혼자 병원비, 간병비를 부담하는데 어려웠을 텐데 동생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동생도 나라는 존재가 그랬던 듯하다.
아이는 많이 낳아야 좋다며 말했다. 참고로 동생은 아직 미혼임에도 그렇게 말했다.
가족끼리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며, 치료비부터 앞으로의 치료계획까지 차분하게 의논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생과 엄마는 나에게 많이 의지했고, 궁금한 부분들을 물어봤으며
치료과정에서 예측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 가족은 협의가 잘 되었던 편인 것 같다.
아빠가 재활병원 재입원을 거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아빠가 쓰러지면서 나는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이 건강해서 일할 수 있는 것.
우리 아이들을 봐주셨던 것.
이 두 가지가 서포트됐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난 무엇이 그렇게 바쁘고 중요했길래 아빠가 아프도록 내버려 뒀을까.
조금 더 신경 쓰지 못했다는 점에서 올라오는 죄책감.
내가 억지로라도 푸시해서 갔어야 했을까.
보험도 가입시켰어야 했을까.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굵직굵직한 것까지...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이라도 부모님 건강할 때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녀야겠다 생각했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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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나의 건강도, 부모님의 건강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가족 사이에서도 필요하다.
아빠가 쓰러졌던 12월 말, 나는 버킷리스트를 써 내려갔다. 당시 아빠는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였고, 수술 후 중환자실에 있었다.
아빠의 의식회복, 스스로 걷게 되는 것,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 재활에 성공해서 말하게 되는 것, 아빠와 대화를 주고받고, 여행에 가는 것을 상상했다.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는 것도 버킷 리스트였다.
그리고 6개월 뒤, 휠체어를 타시기는 했지만 부모님과랍스터를 먹었다.
그리고 아빠 다리 힘이 더 생기면 가까운 호캉스라도 할 예정이다.
아빠는 혼자서 병원을 통원하고 있으며 검사도 받고 연하 치료를 받고 있다.
엄마와 나는 시간이 맞을 때 종종 동행한다.
얼마 전에는 겉절이를 담가주는 정도로 일상생활이 회복됐다. 우리는 안 해줘도 된다. 힘드니까 음식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배달 예정이다. 이 정도로 회복된 것도 꿈만 같다.
부모님에게는 무뚝뚝한 딸이지만 조금씩 표현을 하려고 한다. 부모님이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오늘,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전화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같이 밥 먹을 시간을 내는 것.
부모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오늘, 지금 이 시간 부모님에게 전화 한 통 드려보는 것은 어떨까?
삶은 유한하며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점점 더 줄어든다.
메멘토모리. 내일 내가 죽는다면 어떤 일을 할지, 누구와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때로는 필요한 것 같다. 지금 눈을 감았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연락해 보는 것도
남아 있는 삶에 후회를 남기지 않은 일일 것이다.
김감호사의 뇌경색 간병일지 마침.
© dariamamont,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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