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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Nov 24. 2015

08 이 도시가 만약 한 명의 사람이라면

헝가리 부다페스트

08

이 도시가 만약 한 명의 사람이라면

헝가리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건 깜깜한 저녁이었다. 6인실인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엔 아무도 없었지만, 내 침대를 제외한 모든 침대가 폭격을 맞은 듯 어질러져 있었다. 방바닥엔 술병과 과자 봉지 등이 뒹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차분히 짐을 풀고 야경을 보러갈 채비를 했다. 기차 안에서 읽은 가이드북은 부다페스트를 ‘환상적인 야경으로 유명한 도시’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때 서양 남성 2명과 서양 여성 3명이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술 냄새가 훅 끼쳤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 그들은 “우린 스테잇츠(States)에서 왔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이 미국 젊은이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더니 “오늘밤 계획은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야경을 보러 갈 계획”이라고 답하자 그들은 약간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이따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서 1층으로 내려왔다. 이국의 언어들이 뒤섞여 로비는 소란스러웠다. 1층에 위치한 바를 슬쩍 들여다보니 온갖 서양 젊은이들이 모여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숙소를 나서 세체니 다리로 향하는 길 중간중간마다 옅은 지린내가 났다. 서양 젊은이 무리가 관광용 마차를 타고 광장을 질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알 수 없는 노래를 시끄럽게 합창하는 그들은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나이 든 사람이나 동양인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세체니 다리는 과연 야경으로 유명한 도시의 다리답게 번쩍이고 있었다. 다리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인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포옹을 하고 키스를 했다. 그들 뒤로는 세체니 다리가, 부다 왕궁이, 마차시 성당이, 그리고 강변이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체니 다리의 모습


푸른 달빛 아래 빛나는 국회의사당




마치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세체니 다리엔 수없이 많은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가까이에서 그 조명을 들여다봤다. 빛이 눈을 찌를 듯 달려들었다. 눈이 부셔 표정이 저절로 찡그러졌다.

야경을 살펴보고 방으로 돌아오니 미국 젊은이 5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을 자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나오자, 그제야 그들은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나에게 ‘오늘밤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들 뒤로 미국 젊은이 3명이 더 보였다. 양주와 맥주를 가득 들고 온 이들은 내가 “지금부터는 잠을 잘 계획”이라고 하자, 연습이라도 한 듯 다함께 “오~”라며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더니 술을 챙겨 다시 방을 나갔다. “좋은 밤!”이라는 말과 함께.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이들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한 채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마친 순간까지 그들은 끙끙대며 잠을 잤다.


낮에 본 부다페스트의 모습은 밤의 모습과는 전연 달랐다. 주황색 나트륨 조명이 사라지자 부다페스트의 모습은 회색빛으로 초라해졌다. 어제 저녁 길거리에 그렇게도 많던 젊은이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무표정으로 종종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부다 왕궁에 올랐다. 부다 왕궁에서 내려다 본 도시의 모습 역시 어제 저녁의 그것이 아니었다. 부다 왕궁 밑에 촘촘하게 설치된 조명만이 어제의 야경을 간신히 상기시킬 뿐이었다.




낮에 본 부다페스트의 모습




개인적으로 부다페스트는 그다지 인상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지루한 마음에 인터넷을 통해 관련 정보를 검색해 봐도 야경을 예찬하는 목소리만 가득했다. ‘글루미 선데이’라든가 김춘수 시인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등 부다페스트와 관련된 예술 작품이 있긴 했지만,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가이드북을 참고해 도시를 둘러보고 나니 서쪽 하늘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부다페스트가 불을 밝힐 시간이다.


밤에는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했다. 유람선을 타러 가기 전 숙소에 들르니, 잠에서 깬 미국 젊은이들이 ‘오늘밤 계획’ 구상에 몰두 중이었다. 한 온천에서 여는 클럽 파티가 비싸다는 불평으로 시작한 ‘오늘밤 계획’ 구상은 좀처럼 끝이 날 줄 몰랐다. 그러던 와중에 내게 “오늘밤 계획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지길래 “크루즈를 타러 갈 계획”이라고 답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멋진데?”라고 말했지만, 진심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로비는 어젯밤보다 세 배는 시끄러웠다.


유람선에서 본 야경은 어제처럼 역시나 예뻤지만, 역시나 지루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사진을 계속 찍었다. 같이 온 한국인 동행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왔다면 정말 심심했을 것 같았다.


부다페스트의 밤은 그날도 그렇게 깊어갔다. 다리와 건물은 번쩍이고 거리는 서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쾌락을 쫓아 온 젊은이들로 시끄러웠지만, 나는 견딜 수 없이 지루했다. 부다페스트에 머무르는 사흘 동안 나는 인상 깊은 이야기나 마음속에 각인될 만한 풍경을 찾을 수 없었다.


부다페스트가 만약 한 명의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외양은 화려하고 늘 시끌벅적 신나 보여도 자세히 보면 무언가 텅 비어 보이는 그런 모습 아닐까…. 누군가는 그런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경탄의 시선을 보내겠지만, 나는 아무런 매력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 또한 부다페스트 같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을 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아침 일찍부터 미련 없이 비엔나행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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