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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02. 2015

interlude #5

늙은 내가 우습냐

interlude #5. 늙은 내가 우습냐


스위스 루체른-인터라켄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대규모 한국인 군단과 함께 했는데, 당연하다시피 20대 초중반의 비중이 높았다. 이들의 왕성한 혈기는 대충 이런 식으로 분출됐는데….


(더 이상 올라갔다가는 생명이 위험할 것 같은 리기산 정상에서) “형! 저기 꼭대기 탑 있는데 한 번 올라가 볼까요?” “음… 길이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상관이에요! 그냥 눈 밟고 올라가요!”


(융프라우에서 기차 타고 잘 내려오다가 갑자기) “형! 역에서 내려서 걸어가 볼까요?” “음… 걸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물어보니까 걸어갈 수 있대요! 가요! 가요! 눈썰매 타면 신나겠다!”


(피로한 탓에 술자리를 피하려는 인터라켄의 둘째 날 저녁) “형! 빨리 내려와요! 빨리요!” “음… 오늘은 좀 피곤해서 건너뛸까 생각했는데?” “아, 형! 마지막 날인데 왜 안 내려와요!”


알프스의 추위를 박살내는 그들의 젊은 혈기는 이런 식으로 노구(老軀)를 혹사했다. 열 받은 노인은 깊어가는 인터라켄의 밤… 술에 취해 맥주잔을 구기며 “늙은 내가 우습냐!”를 백번 정도 내뱉었다는 전설이….


이제는 흩어진 루체른-인터라켄 아이들아. 내가 찍어준 사진에 너희들이 만족해서 노인은 행복했단다. 방망이 깎던 노인보다 더 멋진 사진 찍던 노인으로 기억해주렴. 너희들이 왕성한 혈기를 내뿜으며 사진을 빨리 보내달라고 독촉해도, 노인은 속으로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를 되뇌며 사진을 다듬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단다. 이해 부탁하고… 너희는 좋은 동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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