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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02. 2015

12 첫인상과 끝인상

이탈리아 베니스

12

첫인상과 끝인상

이탈리아 베니스


베니스는 과연 ‘물의 도시’라는 별명다운 모습이었다. 산타루치아 역을 나서자마자 대운하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찰랑거리며 도도히 흐르는 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수상버스(바포레토)를 비롯해, 수상택시, 곤돌라, 개인용 배 등 여러 가지 배가 그 위를 유유히 떠다녔다. 그동안 봐왔던 유럽 도시 가운데 가장 이색적인 풍경이었지만,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도시의 첫인상이 예상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니스 곳곳의 풍경. ‘물의 도시’다운 모습이다.




베니스는 물 위에 떠 있는 수상 도시다. 더 자세히 풀어쓰자면, 백 개가 넘는 인공 섬이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다리로 연결돼 있는 도시다. 이런 구조 때문에 생겨난 베니스만의 독특한 특징 하나가 있다.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점 중 하나이기도 한데… 바로 베니스엔 ‘차(車)’라는 물건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베니스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은 예외이다).


그럼 물이 아닌 땅 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다닐까? 그냥 걷고 또 걷는다. 베니스는 좁은 골목이 혈관처럼 구석구석 흐르는 도시다. 골목에 들어서면 양쪽에 우뚝 선 건물 벽 때문에 시야는 좁아지고, 목측이 닿는 곳 이외의 풍경은 미스터리로 남는다. 골목이 끝나면 흥부네 박 쪼개지듯 갑자기 새 풍경이 열린다. 놀랍게도 광장이 짠 나오거나, 뜬금없이 다리가 척 등장하거나, 그도 아니면 다른 골목으로 다시 접어드는 식이다. 종로나 을지로처럼 시야가 탁 트인 대로를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베니스의 골목은 대부분 좁다. 심한 곳은 사람 한두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다.




골목들은 미로처럼 얽혀 있다. 그래서 지도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도를 보고 목적지가 있는 지점과 방위를 파악한 뒤, 목적지가 있는 방향으로 걷는 고전적인 길 찾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백 개가 넘는 섬이 수백 개의 다리로 연결돼 있는데, 이게 어디가 연결돼 있고 어디가 끊겨 있는지 한 번에 알아채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내가 묵는 숙소만 해도 그랬다. 지도에서 볼 땐 산타루치아 역 앞의 스칼치 다리를 건너 북동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될 것 같아 그쪽으로 걸었더니 웬 걸, 길이 물로 막혀 있었다. 숙소에 가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일단 스칼치 다리를 건너 남동쪽으로 조금 걷다가,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아가 작은 다리를 건넌 뒤, 북서쪽으로 몇 걸음 걸은 다음, 북동쪽으로 전진! 베니스에선 목적지에 도착한 뒤 지도로 온 길을 되짚어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지곤 했다.


베니스는 다이달로스의 미궁을 떠오르게 했다. 지도가 무의미한 이 미궁에서 여행자가 꽉 잡아야 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건물 벽 곳곳에 붙어있는 이정표다. ‘PER S.MARCO(산 마르코 방향)’이니 ‘ALLA FERROVIA(페로비아 쪽)’이니 하는 목적지가 적혀 있고, 그 아래 화살표가 그려진 이정표 말이다. 이런 이정표 외에 페인트나 스프레이로 벽에 그려진 ‘수제(手製) 이정표’도 고맙고 반가운 존재. 곳곳에 자리한 이정표는 미궁 한 가운데 던져진 여행자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이정표가 모든 골목에 붙어있는 것은 아니다. 이정표가 없는 골목에선 자신의 본능과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곳곳에 자리 잡은 이정표. 베니스란 미궁 속에선 이 이정표가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골목을 헤매면 헤맬수록, 베니스에서 받은 첫인상은 희미해져 갔다. 내게 베니스는 어느새 ‘물의 도시’가 아닌 ‘골목의 도시’로 다가왔다. 물만큼이나 골목 구석구석이 인파로 찰랑이는 곳, 휙휙 뒤바뀌는 풍경에 깜짝깜짝 놀라는 곳, 때론 길을 잃고 헤매는 곳, 지도란 게 있어도 큰 도움이 안 되는 곳, 그러나 잘 찾아보면 방향을 일러주는 이정표가 곳곳에서 여행자를 향해 미소 짓는 곳, 그럼에도 때론 자신의 본능과 감각에 모든 걸 걸어야 하는 곳…. ‘이 도시는 어쩐지 인생의 은유 같구나….’ 베니스에 대한 내 끝인상은 그렇게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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