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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04. 2015

13 멀리서 바라보면

이탈리아 피렌체

13

멀리서 바라보면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을 오기 전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다시 봤다. 2001년에 만들어진 영화는 변한 게 없었다. 영화 속 피렌체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History’를 비롯해 료 요시마타가 작곡한 OST는 여전히 감미로웠다. 변한 건 나였다. 어린 시절에 봤을 땐 큰 감동을 받았던 것 같은데, 어쩐지 이번엔 시큰둥한 기분이 들었다.


‘복원의 도시’로 그려지는 피렌체. ‘복원사’란 직업을 가진 남자. 그가 복원시키는 과거의 사랑. 은유 자체는 그럴 듯했으나 내용 자체가 너무 판타지로 느껴졌다. 어긋나고 놓쳐버린 것들을 기적처럼 되살리는 이야기에 나는 더 이상 공감할 수 없었다.


피렌체는 영화 속 모습과 많이 달랐다. 도착한 날 짐을 풀고 가죽시장 뒷골목에 들렀는데 약에 취한 듯 눈동자가 풀린 노숙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손을 휘휘 내저어 쫓아내고 몇 걸음 더 걸으니 이번엔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여기가 영화 속에서 본 그 피렌체가 맞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비슷한 기분은 이어졌다. 도시 곳곳엔 팔뚝에 ‘셀카봉’을 주렁주렁 매달고 판매하는 흑인들, 그리고 동전이 든 종이컵을 흔들며 동냥하는 집시들이 넘쳐났다. 차와 스쿠터는 도로 위를 사납게 달렸고 시끄러운 경적 소리를 자주 냈다.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비가 몇 번 내렸는데, 그럴 때면 군데군데 얼룩진 건물들이 한층 더 칙칙한 색으로 변했다.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윤색됐던 도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현실의 피렌체는 어쩐지 영화가 품고 있는 판타지를 폭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피렌체의 지저분한 거리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의 대척점에 있는 영화로서 ‘건축학개론’이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카피를 내건 만큼 영화는 첫사랑이란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환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독할 만큼 현실적이다.


이 영화에서 진하게 배어나오는 감정은 회한인 듯했다. 생애 최초의 충만한 감정만큼 따라주지 않았던 그 시절의 미숙한 행동과 부족한 용기… 그리하여 어긋나고 놓쳐버린 모든 것들에 대한 회한. 영화는 마법처럼 그 시절의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하지만, 판타지는 딱 거기까지다.


15년 만의 키스는 15년 전의 어긋남과 놓침을 바로잡아주지 못한다. 두 사람이 결국 이어지지 않아서, 나는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영화 후반부, 남자 주인공이 스무 살 적 망가뜨린 녹색 철문을 고쳐보고자 낑낑대다 결국 포기하고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그래서 하나의 은유로 읽혔다. 훗날 깨닫게 된다 해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시절이, 바로잡고 싶어도 결코 그럴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영화가 그리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상실과 상처를 지불해야 했던 한 인간의 성장사다. 그에 비하면 복원과 기적의 힘을 믿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이야기는 낭만적이긴 하되… 얼마나 어리고 유치한가.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들 밑엔 대부분 ‘Restored in ○○○○’란 설명이 적혀 있다. ‘○○○○년에 복원된 작품’이란 뜻이다. 유명한 작품인 베로치오의 ‘세례 받는 그리스도’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에도 각각 1998년, 2000년, 2001년에 복원됐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복원되기 전 있었을 흠(欠)의 흔적을 찾는 일은 힘들었다. 특히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림들은 막 태어난 듯 깔끔한 모양새를 자랑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미술관에 걸린 그림들은 이미 처음 그려졌을 때와는 전혀 달라진 무언가에 불과했다. 영원한 건 없어서, 그림 또한 시간이 지나면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우피치 미술관엔 이를 거부하고 수용치 않으려는 인간의 의지가 벽마다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복원의 가치란 게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미술관을 돌았다. 멀리서 바라본 그림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알고 보니 피렌체도 그랬다. 피렌체를 떠나기 하루 전날, 오후 느지막이 두오모 쿠폴라에 올랐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피렌체는 아래에서 본 풍경과 달리 아름다웠다. 멀리서 바라보면 이렇게 아름답구나. 우리네 인생을 거쳐 가는 수많은 상처와 슬픔, 미련과 회한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을 거쳐 갔던 것들을 떠올리며, 저 낮은 곳의 피렌체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두오모 쿠폴라에서 내려다본 피렌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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