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명 Dec 05. 2015

14 ‘천재’ 미켈란젤로

이탈리아 로마 & 바티칸 시국

14

‘천재’ 미켈란젤로

이탈리아 로마 & 바티칸 시국


“천재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


프랑스 소설가 로맹 롤랑이 남긴 말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로마와 바티칸 시국을 둘러본 뒤, 내 머리 속에 깊숙이 각인된 것은 오직 미켈란젤로의 이름뿐이었다.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 판테온… 곳곳에 산개한 문화유산보다 미켈란젤로의 인생과 그가 남긴 작품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감탄은 그가 1538년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에서부터 시작됐다. 캄피돌리오 광장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 시에나의 캄포 광장과 함께 이탈리아 3대 광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고 하는데… 처음 본 순간 든 생각은 ‘대체 왜?’였다. 거대한 면적을 자랑하는 다른 두 광장과 달리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처음으로 만난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내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캄피돌리오 광장의 모습. 이탈리아 3대 광장으로 꼽히기엔 아무리 봐도 규모가 너무 작다.




실망에서 감탄을 분리해내는 첫 번째 프리즘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신앙심에 있다. 신실한 신자인 그는 인간이 아닌 신의 시선을 의식하며 이 광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평범해 보이던 광장을 하늘에서 보는 순간, 아래 사진에서 보듯 광장 한 가운데에 신에게 바치는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또 꽃을 자세히 살펴보면 꼭짓점이 12개인데 이는 예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늘에서 본 캄피돌리오 광장 (출처 : http://obe.so/98d80a)




두 번째 프리즘은 바로 과학. 평평해 보이는 이 광장은 사실 가운데가 봉긋하게 솟아있는데, 이는 배수를 고려한 설계라고 한다. 또 광장에 연결된 계단은 이상하게도 위쪽 계단일수록 좌우 폭이 더 넓다. 이는 밑에서 올려다 볼 때 원근법에 의해 위쪽 계단의 좌우 폭이 좁아 보이는 착시를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밑에서 계단을 올려다보면 모든 계단의 좌우 폭이 동일해 보인다.) 뿐인가. 캄피돌리오 광장에 서서 계단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면 교황이 사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가리킨다고 하니… 종교개혁 당시, 종교의 중심이 아직 로마에 있음을 보여줄 힘 있는 건축을 해 달라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천재’ 미켈란젤로가 구상한 광장다운 모습이었다.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의 유년은 순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읍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미켈란젤로는 한 석공의 아내에게 맡겨졌다.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를 해 집안을 일으켜 세우길 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심취했다. 아버지는 매질을 해가면서까지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미켈란젤로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13세 때 피렌체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 도제 수업을 받는다. 일 년 정도 수업을 받은 후 그는 그림에 싫증을 느낀다. 대신 조각에 끌리기 시작한다. 2차원이 아닌 3차원을 표현하는, 그래서 그림보다 조각이 더 어렵고 위대한 예술이라고 여겼다고 하는데…. 이후 미켈란젤로가 조각 학교에 입학해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된 이유다.


조각가. 그가 ‘천재’로 불리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직업 속에 숨어있다. 흔히 ‘천지창조’라 불리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라는 유명한 벽화를 그린 이는? 다름 아닌 ‘조각가’ 미켈란젤로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피에타’ ‘다비드’ 같은 조각과 함께 프레스코화(벽 표면에 석회와 모래를 섞어 칠하고 그 칠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채색을 해 색이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그린 그림)가 꼽히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두 작품 중 먼저 그린 ‘천지창조’의 경우 프레스코화를 그려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교황의 지시로 공부하며 동시에 그려낸 것이라 하는데…. 본디 조각가였기 때문일까. ‘천지창조’를 처음 보면 마치 천장에 조각상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이나 사진으로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입체감이 느껴진다. 완성된 ‘천지창조’를 보고 교황이 “그림을 그리라고 했는데 왜 조각을 해서 천장에 달아놨냐”라는 말을 했다는 설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라 한들 처음 그려보는 프레스코화가 쉬울 리 없었다. 4년의 세월 동안 천장의 들보에 매달린 채 갖은 고생을 하며 작업을 했다. 갖가지 사료는 당시 그의 고통을 처절하게 기록하고 있다. 허리가 굽고, 시력이 손상되고, 다리 기능이 상실돼가는 가운데서도 그는 시스티나 성당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려냈다. 그 주제와 방법을 지켜내기 위해 ‘절대권력’ 교황 앞에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조건은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진 어떤 누구에게도 절대 공개치 않을 것’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작품 공개 이후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했다’(천지창조), ‘신성한 예배당 벽화의 인물을 모두 나체로 그렸다’(최후의 심판) 등의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세상 모든 것과 타협해도 자신의 예술적 신념만은 타협할 수 없다는 고집. 그리고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에 대한 믿음. 천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미켈란젤로의 작품 앞에서 재능도 재능이지만, 고집과 믿음을 지켜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만이 천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 물론 자료 사진을 구할 순 있지만, 사진으로 보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돼 첨부하지 않는다. 나 역시 두 작품 모두 이미 수차례에 걸쳐 사진으로 접한 바 있지만, 실제로 접하고 느꼈던 감흥은 전혀 달랐다. 천장화와 벽화라는 특수성, 또 엄청난 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그림이 아무리 유명해도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조각상 중엔 저 유명한 ‘피에타’가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하면 소설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떠오른다. 소설의 에필로그 ‘장미 묵주’는 바로 이 ‘피에타’가 있는 성 베드로 성당 내에서 펼쳐진다. 시점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9개월째. 소설 속 ‘너’는 바티칸 시국에서 관광 프로그램을 참여하다가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바티칸 시국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라는 것을. 그리고 불현듯 떠올린다. 잃어버린 엄마가 지난 날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가게 되면 장미나무로 만든 묵주를 구해다달라고 했던 것을. 기념품점에서 마주친 장미 묵주의 값은 15유로. ‘너’는 이 장미 묵주를 사서 손에 든 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앞에 선다.


바티칸 시국을 둘러보다가 알게 된 새로운 사실. 신경숙은 실제로 바티칸 시국을 방문해 한 투어 업체의 바티칸 시국 관광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거기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엄마를 부탁해’에 투영했다고 한다. 천재의 작품은 이렇게 후대의 예술가에게 큰 영감을 주나보다. ‘엄마를 부탁해’를 매우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 피에타를 실제로 보게 돼 굉장히 감격스러웠다. 미켈란젤로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조각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울지도 않는 성모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정면에서 바라본 ‘피에타’




‘피에타’와 관련해 두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둘 다 성 베드로 성당 내에서 가이드가 들려준 이야기다. 먼저 첫 번째. 이 조각상은 세상에 공개된 후 ‘성모가 너무 젊고 아름답게 묘사됐다’ ‘성모가 예수에 비해 더 크다’ 등의 이유로 논란을 겪었다. 특히 ‘조각상의 주인공이 예수가 아니라 성모 같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훗날 이 조각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된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역시 미켈란젤로는 천재”라며 감탄을 늘어놨다. 인간의 시각이 아닌 하늘에 있는 신의 시각에서 바라본 후 뜻밖의 발견을 한 것이다. 신의 시각에서 보면 성모는 완벽히 존재감을 지운다. 성모의 젊은 외모도 거대한 크기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가 하늘에 계신 신을 위해 만들었을 ‘피에타’. 이 조각상을 신의 시각에서 보면 진짜 주인공인 예수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피에타’. (출처 : http://tuney.kr/218oGx)




두 번째 이야기.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유일하게 서명을 남긴 작품이다. 서명은 성모의 어깨띠에 남아있다. 왜 그랬을까. 가이드는 ‘다른 조각가가 만들었을 것’이라는 소문에 24세의 젊은 미켈란젤로가 화가 나 밤을 틈 타 ‘피렌체 사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는 서명을 몰래 새겨 넣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서명을 새기고 난 후 밖으로 나온 미켈란젤로는 크게 자책했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만든 신은 그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는데, 신의 피조물인 나는 조각상 하나 만든 주제에 잘난 척하며 이름을 새겨 넣었구나…’ 하고. 결국 미켈란젤로는 이후 그 어떤 작품에도 서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피에타’에 새겨진 서명은 미켈란젤로의 처음이자 마지막 서명이 됐다고 한다.


나는 두 번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놀라운 천재에게도 범인(凡人)의 면모가 묻어나던 시절이 있었구나…. 성모의 어깨띠에 새겨진 그의 서명은 인간의 한계를, 또 미켈란젤로도 결국 나와 같은 인간임을 새삼 실감케 했다. 그래, 인간이기에 오랜 세월 반복되어 온 인류의 슬픔과 사랑을 조각에 담아 이렇게 전할 수 있는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옮겨 두고 싶은 ‘엄마를 부탁해’ 속 구절들이 있다. ‘엄마를 부탁해’ 4장 ‘또다른 여인’에선 죽은 엄마의 혼(魂)이 화자(話者)로 등장한다. 혼은 저승으로 가기 전 세상을 떠돌며 자식과 가족, 또 숨겨두었던 인연까지 두루 살핀 뒤 마지막으로 태어난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혼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만난다. 4장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엄마는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우리는 지금 또 하나의 압도적인 피에타상 앞에 서 있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이랴.”

매거진의 이전글 13 멀리서 바라보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