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 걷기 그 후 3년,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아간다.

by 엄재균

처음 한 걸음 떼기가 어렵다.

일단 걷기 시작하면 '관성의 법칙'이 행동에도 적용된다.


매일 만보 이상을 걸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걸었을까? 육체의 건강도 도움이 되지만 정신적으로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걷는 시간은 내 삶을 돌아보는 순간들이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의 키워드와 맥락을 함께 메모장에 쓴다. 생각이 난 순간에 쓰지 않으면 어느새 달아나기 때문이다. 기록은 기억을 남긴다. 메모장에는 각종 생각의 조각들이 켜켜이 쌓인다. 생각의 조각들이 모여 ‘생각의 흐름’이 된다.


생각의 흐름을 우물에서 물을 걸러 올리듯이 머리에서 인출하여 정리해야 한다. 생각이 축적되어 넘칠 즈음 자연스레 생각의 흐름을 농지와 집수장으로 흘러 보내야 한다. 밖으로 흘러 보내지 않고 고여 있으면 가뭄 철의 저수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돈도 쌓아 놓기만 해서는 효용 가치가 없다. 흘러 보내야 경제활동에 도움이 된다. 공부도 마냥 읽고 듣기만 해서는 효과가 떨어진다. 읽고 들었으면 말하고 써야 한다. 생각의 흐름은 글로 써야 그 생각이 완결된다.


글 쓰기를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루틴이 필요하다.

소설가 김훈은 하루 원고지 5장을 반드시 쓴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오전에 글을 쓰고 오후에는 달리거나 수영을 한다. 그는 40년을 규칙적으로 했다. 나도 루틴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아침에 걷고 난 후 샤워를 하고 조용히 서재에 앉아 일단 노트북을 켠다. 노트북을 켜는 순간, 글 쓰는 준비가 되었다. 메모의 내용을 보고 대강 얼개를 잡은 다음 바로 자판을 두들긴다. 중간에 막히기도 하고 쓰고 나면 '무슨 말을 하고 있지?' 하고 글이 맥락도 없고 길을 헤매는 경우도 많다. 다시 수정하면 된다. 걸으면서 또한 글 쓰는 과정에서 지난 기억을 떠 올리면서 나 자신과 만난다.


핸드폰에 있는 메모 앱에서 최초로 적은 첫 번째 메모를 찾았다. 호기심이 생겼다.

2011년 12월 17일 쓴 메모이다.


“내가 죽기 전에 할 일,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일”


이라는 글이다. 가고 싶은 여행지와 요리를 배우겠다는 것, 그리고 “The History of My Life” 가 적혀 있다. 오래 전,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그 솔직함과 담대함에 감동을 받았었다. 나도 내 생애에 관한 수필을 쓰겠다는 의지를 그 당시 적어 놓았다. 어느덧 생의 후반으로 들어선 지금, 내가 지나온 길을 글로 정리하고 싶었다. 딸들에게 나의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 죽기 전에 할 일 중의 하나인 “나의 생각”에 대한 글을 지금 쓰고 있다.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책 읽기는 늦깎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입대를 위해 집에 있을 때, 한길사에서 나온 함석헌 전집을 읽었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인간 혁명의 철학』,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등이다. 처음으로 글의 힘을 몸으로 느꼈다. 『토지』, 『태백산맥』, 『혼불』 등의 대하소설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 후부터 독서에 흥미가 생겨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다. 문제는 그렇게 읽은 소설이나 수필의 내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책이나 영화에서 느낀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 전달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읽고 보는 당시는 흥미롭고 감흥이 생겼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메모를 시작한 이유이다. 도대체 읽었다는 책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습관의 힘』은 이미 종이책으로 샀는데 다시 전자책을 샀다. 중간까지 읽은 흔적도 있다. 어이가 없었다. 왜 자신이 산 책까지도 기억을 하지 못할까?


메모를 시작했다.


산책길에서 생각나는 것을 메모하는 야외 카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컬럼비아 대학의 에릭 캔델 교수의 실험에 의해 단기에서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뇌신경 연결의 촉매제인 '크랩' 단백질을 발견하였다. 단기 기억의 정보를 반복적으로 학습하면 새로운 뇌신경회로가 '해마'에서 만들어져 뇌의 다양한 부위의 신피질에 장기기억으로 저장된다. 크랩 단백질의 발견은 머리를 쓸수록 영리해진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혔다 [기억을 찾아서, 에릭 캔델, 알에이코리아, 2014년].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인출하는 과정에서 뇌신경세포인 뉴런의 시냅스가 활발하게 네트워크를 연결하여 뇌기능을 활성화한다. 아무리 감동을 받았던 영화나 책도 다시 인출하는 과정이 없으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이유다. 뇌는 쓰지 않는 신경회로는 효율성을 위해 없앤다. 메모하는 습관이 중요한 이유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것은 입력 과정이다.


기억은 입력, 저장 및 출력 과정을 거쳐 장기기억으로 최종 저장된다.

읽는 행위는 시각정보로서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입력 통로 중의 하나이다. 입력 정보는 뇌의 측두엽 피질 안쪽에 위치한 '해마' 부위에서 단기 기억으로 잠깐 저장되었다가 일부만 여러 형태의 지식으로 변환되어 장기기억으로 된다. 단기 기억은 신경전달물질이 일시적으로 분비되고 생기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짧은 시간 내 사라진다. 예를 들면 컴퓨터의 RAM(Random Access Memory)은 전원이 끊어지면 워킹 메모리에 기록된 입력 정보도 모두 날아간다. 인간의 단기 기억과 비슷하다.


단기 기억을 잃지 않고 장기로 보내려면 '인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출하는 작업에는 암송, 토론, 발표, 메모, 시험, 글쓰기 등이 있는데 대부분 말하고 쓰는 행위다. 인출 과정을 자주 거친 정보는 ‘의미 기억’이라 불리는 범주화된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장기기억으로 전환된다 [박문호 박사의 뇌 과학 공부, 김영사, 2017년].


좋은 예가 있다.

대학에서 같은 반의 튜터(Tutor) 학생이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는 원리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는 학생에게 튜터는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인출하여 더 확실하게 이해하고 의미화된 기억으로 밀도 있게 저장된다. 당연히 다음 시험도 잘 볼 수 있다. 효과적인 공부를 하려면 인출 과정이 꼭 필요한 이유다. 나 역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도중에 생각이 정리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강의라는 말하기도 인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인출 효과’를 보고 있다.


메모와 글쓰기 작업은 인출하는 과정이다. 글 쓰는 것은 생각을 모으고 정리하는 인출 작업을 반복하기 때문에 기억에 오래 남는다. 다시 보고 되새김질까지 할 수 있어 장기기억으로 많이 저장된다. 아무리 장기기억이라도 쓰면서 기록하지 않으면 결국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과 같다. 장기기억의 주체가 소멸되면 기억도 함께 사라지지만 기록은 후대까지 오래 연결된다. 글쓰기는 가장 강력한 기억 매체이다. 글쓰기를 한 후부터는 책을 읽을 때도 목적 없이 볼 때와 느낌이 전혀 다르다. 항상 내가 쓴 글과 연결하여 맥락과 참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글쓰기는 ‘인출 효과’가 크다.


책과 경험을 통해 입력된 정보는 바로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단기 기억에 머물다 사라지고 일부는 무의식 깊은 곳으로 스며 들어갔다. 한번 인출된 정보는 어디 도망간 것이 아니라 깊은 우물 속에 고요히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 기억들을 인출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그때 메모한 것이 필요하다. 생각의 첫 고리를 찾아야 한다.


첫 고리를 찾는 순간, 나의 의식 깊은 곳에 있던 경험과 기억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우물에서 물을 길듯이 두레박에 떠올라 온다.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생각들이 모인 다발이다. 글쓰기를 하면서 우물에서 길어낸 생각의 줄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평소에 걸으면서 생각나는 것을 메모하고 브런치에서 그 메모를 풀어 글로 표현한다. 그 글을 세상에 내보내는 작업은 어렵고 조심스럽다. 브런치의 ‘작가의 서랍’에 두어 숙성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글은 가만 두어서는 숙성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산책을 하면서 그 글을 다시 떠올린다. 다시 머릿속에 떠 올린 글이 완성도가 떨어지고 허접하게 느낄 때가 많다.


항상 두 가지 기준에서 글을 다시 평가한다.


내 감정을 진솔하게 담았는가?
그리고 읽는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고쳐야 할 내용을 키워드 중심으로 메모한 후 다시 책상에 앉아 수정한다. 그리고 발행 버튼을 누른다. 브런치 덕분에 책 읽는 소비자에서 글 쓰는 생산자로 바뀌었다. 전공에 관한 책은 출판했지만 내 개인적인 소회를 풀어내는 에세이는 처음이다. 브런치를 이용하면서 ‘세상에는 고수가 많구나’를 다시 한번 절감한다.


『강원국의 글쓰기』를 읽으면서 내가 지금 쓰면서 느끼는 고민과 경험이 같아 공감했다. "아는 것을 표현하는 데도 욕심이 개입한다. 누군가에 잘 보이고 싶은 욕심도 장애물이다. (중략) 글을 읽는 사람은 글쓴이가 얼마나 잘 쓰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관심 없다. 그들이 관심 갖는 것은 글에서 하는 얘기가 뭔지 그 얘기가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하는 것이다. (중략) 잘 쓰려면 잘 살아야 한다. 삶이 바로 글이다." 강원국이 강조하는 지점이다. 맞다. 독자로서 책을 읽으면서 많이 느낀 점이다. 글 쓰면서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이제는 몸으로 실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보 걷기를 시작한 후 3년이 되는 지금,


나는 이제 그 기억들을 담아내어 글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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