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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꼬리표’를 떼어 내려면

실패를 두려워하는 당신에게

by 엄재균

EBS 교육방송이 요즘 상종가를 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학교를 가지 못하는 초등학생부터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까지 EBS 방송을 본다. 교육 콘텐츠도 상당히 쓸 만하다.


나 역시 강의에 도움이 되는 다큐가 있으면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시청하기를 권유한다. 오래전, EBS 지식채널의 “실패가 두려운 당신에게”라는 짧은 동영상을 소개했다. 핀란드 대학 얘기다. 한때 잘 나가던 노키아가 무너지면서 핀란드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자리를 잃었다. 노키아의 몰락 후 핀란드에서는 도전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덮쳐 기업자 정신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한 대학의 창업동아리에서 ‘실패의 날’을 만들어 실패한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 위로하면서 그 두려움을 없애는 역할을 하였다. 실패의 날을 제정한 학생은 “하나의 성공 뒤에는 수많은 실패가 있었기에 기업가 정신을 되새기고자 ‘실패의 날’을 만들었다”라고 강조한다. 우리 역시 지금까지 성공신화에만 열광하여 그 뒤에 숨은 수많은 실패의 경험을 외면했다.


기업의 창업 분야뿐만 아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실패의 경험이 필요하다.

왜 소수의 사람은 실패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패를 반복하면서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할까? 무엇이 실패와 성공으로 갈라놓을까?


우리는 건강을 위해 운동을 시작하기로 하고 도중에 실패하고 자책감에 빠진다. 체중을 빼기 위해 식이요법을 시작하다가 도중에 딱 한번 참지 못하고 과식을 하고는 한탄한다. ‘역시 나는 의지가 약해’ ‘나는 뭘 해도 안 돼‘라고 자기 비하를 하고는 그만둔다. 작심삼일이다.


그런데 그 실패 다음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체중조절도 하고 운동습관을 들인다. 그러나 다수는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는다. ‘역시 나는 의지가 약한 놈이야’라는 꼬리표를 달고는 포기한다. 식이요법과 운동뿐만이 아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빨리 포기할까?

그냥 포기하지 않고 ‘나는 원래 그래~’라고 꼭 ‘꼬리표’를 달면서 포기한다. 결코 그냥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딱지’를 붙인다. 그것도 아주 나쁜 딱지를 붙이고는 포기한다.

왜 그럴까?

자신이 책임을 지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심리학자인 웨인 다이어의 저서인 <행복한 이기주의자>에서 찾아보았다. 자신에 대한 성격 혹은 신체에 꼬리표를 달고 나면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변명이 되고 위로가 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내성적이고 겁이 많아”, “난 원래 운동신경이 둔해”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붙이면 나의 실패 원인을 모두 유전적인 탓으로 돌릴 수 있다. 내 탓이 아니라 조상 탓이 된다. “잘 되면 내 덕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말이다. 중간에 쉽게 그만둘 수 있는 퇴로를 스스로 만든다. 그러니 실패를 하고는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 나를 이런 꼴로 낳아준 부모 탓으로 돌리면 끝이다. 책임을 회피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중학교 고학년에 되면서 수포자(수학 포기자), 영포자(영어 포기자)가 속출한다. 학교에서 교사들부터 학습 부진학생들을 방치하기 일쑤다. 그러면서 학생들 스스로 “난 원래 수학에 약해, 영어 독해를 못해”라고 포기한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꼬리표를 단다. 그 순간 학생과 교사 누구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학생은 부모의 탓으로 돌리면 된다. ‘머리가 나빠서’ 혹은 ‘좋은 학원을 못 가서’라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학생들이 스스로 꼬리표를 다는 이유도 실패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 실패의 결과에 대해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회피를 한다. 두렵기 때문에 아예 피하는 것이다. 노력을 회피할 수 있는 탄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원래 머리가 나빠’라고 생각하면 무기력해진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겪은 무기력은 성인이 되면서도 경쟁이 심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 강력하게 ‘무기력’을 발휘한다. 모든 일에 소극적이 되고 조금 노력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만다. 작심삼일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붙이는 ‘무기력의 꼬리표’를 스스로 떼지 않으면 누구도 하기 어렵다.

남녀 간의 연애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난 매력이 없어, 난 너무 뚱뚱해, 난 너무 키가 작아”라는 루저의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그래서 내가 연애에 실패하고 애인이 생길 수 없지 뭐“라고 자책감에 빠진다. 자신이 가진 강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점만 도드라지게 생각하고는 실패에 대한 면죄부를 미리 스스로 발부한다.


모든 불안에는 궁극적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그 근원에 있다. 실패를 하고 난 다음 어떻게 그 실패를 대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 중요한 이유다. 먼저 나 자신이 ‘꼬리표’를 스스로 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어릴 적부터 마음의 습관이 된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온 습관은 마음으로 고치기는 쉽지 않다. 노력은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그럴 때는 몸으로 고쳐야 한다. 마음 수련을 통해 마음을 통제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는 몸의 자세에서 온다.


나의 경험으로도 ‘몸의 자세’에서 문제가 생겨 마음까지 영향을 받았다. 몸으로 하는 행동을 통해 마음을 바꾸고 삶을 바꿀 수 있다. 앉는 자세, 걷는 자세, 그리고 타인을 대하는 자세이다. 나 역시 왠지 모르지만 어릴 적부터 항상 삐딱하게 앉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 지를 않았다. 이미 오랜 습관이 되었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자신의 걸음걸이를 본인은 잘 모른다. 내가 어떻게 자세를 취하고 걷는지 알 수 없다. 나 역시 아내가 가끔 얘기를 하면 그제야 알 수 있다. 허리를 뒤로 빼고 목은 앞으로 내밀면서 터벅터벅 걷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오래 걷지 않아도 발바닥이 아프다. 허리와 척추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몸으로 허우적거리며 걸으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축 처진 자세는 뇌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처진 자세를 취하면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그 현상을 알고 나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내 눈에 들어온다. 정말 별의별 형태의 걸음걸이가 있다. 얼굴 표정까지 보면 세상의 짐을 혼자 짊어가는 사람이 눈에 많이 띈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걸음걸이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단 책을 읽었다.


<걷기의 재발견>,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 등 많았다. 걷기를 통해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을 고양시키는 글도 보인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걷기의 유혹>와 다비드 브르통의 <걷기 예찬>,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 등이 있다. 모두 걷기가 일상의 습관이 된 저자들이다.


나도 걸음걸이부터 바꾸기를 노력했으나 어느 순간 예전의 습관대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았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지만 일상의 습관이 된 자세를 바꾼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방법은 ‘알아차리기’다. 연습하는 길밖에 없었다. 밥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먹는 속도가 급했다. 습관이었다.


오래전, 천천히 먹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하여 바꾸려고 하였다. 이것 역시 밥 먹을 때 ‘알아차리기’였다. 먹을 때, 걸을 때, 말할 때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고칠 수 있으니.

나를 객관화하는 ‘메타인지’ 능력이었다.


물론 일상의 행동인 걷고, 먹고, 앉는 자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의 대화와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에서도 ‘메타인지’가 중요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생기면서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도 도움이 되었다. 특히 가장 가까운 관계인 아내와의 소통에서 훈련이 많이 된 것 같다.


걷는 자세가 이렇게 감정 조절까지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할 수 있겠다. 걸으면서 의식을 하면서 아랫배에 힘을 주고 척추를 세우고 시선은 정면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정말 희한하게도 그다음부터 걷는 것이 힘이 들지가 않았다. 걷기 자세를 바꾸면서 앉는 자세도 교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예전 습관대로 삐딱하게 앉을 때마다 먼저 그것을 인식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가능한 1~2 시간 이상이 되면 가능한 일어서서 조금 움직이길 시도했다. 그 효과 나타났다.


그 작은 성취로 인해 다른 모든 일에도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몸의 자세가 삶의 변화가 온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이 작은 변화가 자연스럽게 삶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몸의 변화가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사소한 일에 도전하고 실패를 통해 경험을 쌓는다.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조던 피터슨은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무엇보다 먼저 “어깨를 펴고 반듯하게 서라 “고 강조한다. 몸으로 느끼는 경험이 뇌와 마음에도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몸을 똑바로 하라는 말에는 정신 역시 똑바로 하라는 요구가 들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상호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분도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고 걷는 연습을 해보라. 걸을 때도 마찬가지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도록 하고 어깨를 활짝 펴서 걸어 보아라. 그리고 예전의 자세와 비교해보라. 금방 그 변화를 느낄 것이다.


그것은 자신감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몸에서 직접적으로 강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삶에 대한 불안감은 줄어들고 생을 더욱 진지하게 느낄 수 있다. 피터슨 교수에 의하면 세로토닌 신경전달물질이 증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로토닌이 신경 회로를 타고 충분히 흘러가면 행복감이 높아지고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실패를 하더라도 회복 탄력성이 높아서 그 아픔을 견뎌내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12가지 인생의 법칙> 중에 첫 번째 법칙이 “어깨를 펴고 반듯하게 서라”가 만들었던 것 같다.


몸의 자세 변화로 마음이 바뀌고, 그 바뀐 마음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결국 삶의 습관이 되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머리를 굴리면서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통제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머리만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중요한 행동 하나가 ‘긍정의 신경회로’에 신호를 주어 자존감을 높일 수 있게 된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에미 커디 교수도 TED에서 “몸짓 언어(Body Language)가 여러분의 모습을 만듭니다.”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비언어로 분류되는 얼굴의 표정과 몸의 자세로 우리는 타인과 소통을 한다.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아내가 혹은 남편이 기분이 좋거나 혹은 즐거운지를 판단할 수 있다. 비언어는 타인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2분만이라도 자신의 자세를 바꾸면 뇌의 호르몬에도 변화를 준다고 한다. 우리는 대부분 평소에 움츠리고 있거나 삐뚤거나 소극적인 자세로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목까지 숙이면서 더 움츠리고 있다. 커디 교수는 어깨를 펴고 자세를 똑바로 하면 에너지의 원천인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은 증가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졸은 감소한다는 실험 결과를 보여 주었다.


더 나아가 감정이 우울할 때라도 일부러라도 스트레칭을 하고 자세를 활기차게 하면 감정의 상태도 긍정적으로 바뀐다는 놀라운 사실도 발견했다. 마음이 울적할 때 혹은 웃을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부러 입 꼬리를 올리고 웃기 시작하면 감정도 따라서 변한다. 그래서 얼굴 표정도 평소 습관에서 결정된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실패를 겪으면서 좌절의 늪으로 빠질 수 있다.

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새롭게 일어서는지가 중요하다. 그 실패에 ‘꼬리표’를 붙이고 회피하는 순간 그 실패를 극복할 기회를 놓쳐 버린다. 실패가 계속 이어지면 ‘난 안돼..’라는 부정적인 뇌신경회로가 생성된다. 그다음부터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도전을 피하려고만 한다. 경미한 통증을 고치지 않고 놔두면 뇌에서 ‘통증 회로’가 만들어지는 것과 동일하다. 실제로 통증이 없어도 뇌가 통증을 느끼는 만성통증으로 발전된다.


인생에서 실패가 거듭되면 가능한 사소한 도전에 대한 성공의 경험을 맛보아야 한다.

아주 작은 도전도 도움이 된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성취를 맛 보아야 한다. 얼굴 표정 또한 마찬가지다. 항상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자신에게 달린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꼬리표’를 떼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작은 도전에 실패할 때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돌이켜 보고 ‘알아차려야 한다.’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 머리로만 생각하면 오히려 더 혼란스럽다.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기 전에 어질러진 자신의 방부터 치우라 ‘는 말이 있듯이. 지구의 기후변화를 논하기 전에 일상에서 ‘분리수거’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 회사의 흥망성쇠를 걱정하기 전에 사내에서 하루 종일 주식동향을 쳐다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 자세를 꼿꼿이 하고 걸어라.


‘무기력한 꼬리표’는 어느새 사라지고 긍정의 습관이 몸에 배이기 시작한다. 몸과 마음은 결코 떨어져 있지 않다. 어느새 내 마음에 자신감이 생기고 평안이 찾아온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기 효능감’이 생긴다.


내가 지금 ‘무엇을, 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결국은 나를 알아가는 길이다.

한번 같이 해 보지 않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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