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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반려견과 산책하는 즐거움

우리 집 막내 ‘재롱이’

by 엄재균
두 딸이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서로 많이 다투곤 했다.


강아지를 키우면 딸들이 서로 사랑하는 법도 알고 둘 사이의 갈등이 잦아들기를 바라며 인터넷을 통해 강아지를 입양했다. 흰색 말티즈였다. 아이들이 무척 귀여워했다. 문제는 도무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거였다. 나름 훈련을 시켰음에도 아무데나 오줌을 싸댔다. 내가 성질이 나서 윽박지르면 아이들 표정이 일그러졌다.


훈련하는 방법을 몰랐다. 말티즈는 성격이 예민하기 때문에 사회화 훈련을 하면서 칭찬과 보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아이들 정서 순화를 위해 데려왔는데 내 정서가 더 불안해졌다.


결국 그 강아지는 인터넷을 통해 "마당이 있는 집에서 뛰어 놀게 해주고 많이 사랑해 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켰다. 마지막 보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 같이 사는 강아지 이름은 ‘재롱’이다. 작은 푸들이다. 2005년에 우리 집에 왔으니 이제 나이가 15살이다.


강아지 나이로는 할배 뻘이다.


처음 데려오니 고양이처럼 앞발로 먼저 의사를 표현한다. 아내는 재롱이가 처음 태어날 때 형제 둘과 고양이 한 쌍과 함께 살다가 3개월 되던 때 우리 집에 왔다고 한다. 과거의 아픈 경험도 있어 대소변 훈련부터 시켰다. 소변은 정해 놓은 패드위에서 보는데 대변은 이곳 저곳에서 싼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하고 감지덕지하면서 고마웠다. 오줌을 눌 때 항상 ‘리추얼’을 벌인다. 오줌을 눌 주위를 정확히 세 바퀴를 뱅글뱅글 돈다. 탑돌이를 한다. 무엇을 빌고 있는거지? 그리곤 중앙을 향해 정 조준한다. 아무리 급해도 이 루틴을 지킨다. 백 프로 명중률! 사람처럼 소변기에 파리같은 그림이 필요 없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루틴이고 뭐고 없이 신통치 않게 싸댄다.


예전에는 강아지를 ‘애완견’이라 했고 아직도 방송에서 가끔 애완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내가 필요할 때 아양을 떨고 심심할 때 같이 놀아주는 정도로 인식하는 순간 강아지는 장난감이 되고 만다. ‘반려견’은 ‘애완견’이라는 용어의 쓰임새와 느낌이 전혀 다르다. 반려견이라는 단어 자체가 처음에는 다소 낯설었다. 강아지는 우리 인간에게 여러 혜택을 주는 생명체임을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동반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입양했지만 지금은 평생 한 가족이 되었다.


개와 고양이를 포함한 동물도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동물도 인간과 다르지 않는 소중한 생명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호주의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로부터 비롯되었다. 1975년 그의 저서인 『동물해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당시 여성해방에 이어 서구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피터 싱어는 한 개체가 다른 종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고 학대하는 것은 엄연한 편견이라고 보았다. 흑인의 피부색이 검다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것이 부도덕하고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과 같은 논리이다. 그는 이를 '종(種)차별'이라 부른다.


인간은 자신이 다른 동물과 비해 존엄하거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동물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동물은 자신이 살기 위할 때만 다른 동물을 죽이지만 인간은 호기심과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미각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인다. 밍크 코트를 입고 한껏 뽐내면서 거리를 활보하는 생각없는 부인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인다. 심지어 인간은 탐욕과 권력을 위해 같은 종족인 인간도 살해한다. 인간 이외에 어떤 동물도 이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고도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피터 싱어는 동물해방론자이기 전에 철학자이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효율적 이타주의자』에서 "사람은 본디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존재를 이성의 힘으로 세속 윤리를 세우고자 한다"고 강조한다. 이기적인 유전자와 이타적인 윤리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칼과 석궁으로 닭을 죽이게 한 회장이 생각난다. 동물학대로 고발당했다. 이타적 윤리가 사라진 현장이다. 끔직한 일이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생각난다. 그때는 반려견을 왜 인격적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가끔 재롱이가 귀여워 쓰다듬어 주면 처음에는 가만이 있다가 과도하게 쓰다듬으면 싫어한다. 자기 감정을 무시하고 계속 귀엽다고 만지면 어느 순간 조금씩 불편한 기색을 나타낸다. 결국엔 입주위가 씰룩거리며 올라간다.


짖을 태세이다. 대 놓고 싫다고 한다.


처음에는 기분이 상했다. 내가 너를 좋아서 만져주는데 주인도 몰라보는 '문제견'이라 생각했다. 도대체 왜 그럴까?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알게 된 반려행동 전문가인 강형욱씨가 쓴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를 읽었다. 나와 똑 같은 상황에 대한 진단이 나온다. 강형욱은 “그런 당신은 개를 키울 자격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상황에서 입장을 바꿔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싫은데도 계속 만지면 나는 기분이 좋을까’


라고 묻는다. 결코 아니다.

난 강아지를 키울 자격도 없었다.


‘재롱'이도 사람과 같이 섬세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걸 몰랐다. 훈련시킨다고 ‘이리와!, 앉아!’ 명령에 따른 복종만 강요했다. 결국 반려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지하기 때문이었다. 반려견이 당신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당신은 반려견과 대화하고 있나요?』의 저자 김윤정이다.

그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국제 인증 반려동물 전문가’로 행동심리에 기반하여 반려견이 스스로 행동을 선택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 “개는 군대의 훈련 캠프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여러분과 함께 사는 가족이다. 개가 나와 무언가를 함께 하기를 바란다면, 굳은 얼굴과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하지 말고 작고 명랑한 목소리로 요청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개는 서열이 높은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정서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 즉 함께 있는 것이 즐겁고 행복한 사람의 말에 집중한다” 그녀의 합당한 충고에 내 가슴이 뜨끔해진다.


3개월 된 아기 강아지 재롱이가 우리 집에 오면서 새로운 가족과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쓰는데, 내 편하려고 훈련만 시키려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따뜻하게 대하지 못한 것도 못내 아쉽다. 앞에 앉혀 놓고 다짜고짜 훈련한다고 명령조로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없다. 반려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강아지를 평생 동반자라는 뜻의 '반려견’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르는 이름이 남 다르듯 그들은 더 이상 장난감이 아니라 친구이자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퇴근할 때 현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녀석이 ‘재롱이”다. 아마 하루 종일 기다렸을 거다. 나름 서열을 만들어 행동한다. 우리 집 막내 딸이 오면 잽싸게 현관으로 가지 않는다. 너무 귀엽다고 ‘오냐 오냐’ 하니까 자기 밑이라고 생각한다. 귀엽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제 15살 재롱이도 늙어서 활동량이 점차 줄어든다.


가능한 활동을 하지 않고 잠만 잔다.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고 건강하고 병도 없는 편인데도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가끔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벌써 이별을 생각해야 하나. 그래서 요즈음 재롱이가 좋아하는 산책을 자주 나간다.


함께 더 즐거워하고 추억도 많이 만드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같이 산책을 자주 갔는데 가끔 기력이 약할 때는 아내가 가슴에 안고 아파트 주변을 돌곤 한다. 산책을 나가면 재롱이는 온 세상을 탐색한다. 공기 냄새를 맡고 화단 밑에 있는 동네 강아지의 냄새를 맡는 등 후각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당신은 반려견과 대화하고 있나요? :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강아지 언어』에 의하면 "사람은 후각 수용체가 약 500만 개이지만, 개는 대략 3억 개이기 때문에 냄새만으로 잠재적 암환자(암에 걸렸는지 여부)까지도 찾아낼 수 있다." 고 강조한다.


주위 세계를 탐색하며 즐기려고 한다. 내가 시간이 없어 빨리 걸음을 재촉하더라도 자기가 아직 탐색할 세계가 남아 있으면 기어코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산책길에 옆 동네 아파트와 경계에 쉼터가 있는데, 그 곳은 온 동네 강아지가 모이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원래는 주민이 쉬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이 있다.


그 ‘만남의 광장’에서 재롱이는 동네 강아지가 화분 벽에 싸놓고 간 친구들의 흔적을 다 확인한다. 누가 나왔으며 언제 놀다 갔는지 점검하는 작업이다. 개의 코가 항상 촉촉한 이유도 냄새 입자를 잘 잡아서 냄새를 더 잘 맡기 위해서다. 개의 건강은 코의 상태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냄새를 맡고는 자기도 왔다 갔다는 흔적을 꼭 남긴다.


여러 곳에 너무 자주 남기려다가 어떤 경우에는 다리는 들었는데 오줌이 나오지 않아 순간 자기도 머쓱해 한다. 그때는 괜히 몸과 머리를 흔든다. 산책길에 다른 개와 만나면 천천히 상대의 엉덩이 방향으로 가서 냄새를 맡는다. 처음에는 ‘왜 꼭 항문에다 코를 들이 댈까’ 의아 했다.


『당신은 반려견과 대화하고 있나요?』를 보니 개의 엉덩이 부근의 항문선에서 나는 냄새로 상대의 나이와 성별과 같은 개인정보를 파악한다고 한다. 우리가 서로 처음 만나 얼굴을 보고 나이와 성별을 파악하듯이, 개들은 후각을 통해 인식한다. 사람도 처음 만나면 빈 손으로 악수를 하면서 적의가 없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행동을 한다.


강아지도 같은 이유로 엉덩이 쪽으로 접근하면서 서로 탐색하면서 호의를 표시한다. 그럴 때 이제는 줄을 끌어 댕기지 않는다. 재롱이는 세상을 눈으로 보고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 인식하고 대화한다. 산책길에 재롱이의 세상 탐색이 길어지면 나와 잠깐 신경전이 벌어진다. 오래 맡고 있으면 내가 살짝 끈을 당긴다. 재롱이는 일단 버틴다. 내 눈치를 보다가 나의 의지가 강하다 싶으면 포기하고는 쭐래 나를 따라온다. 너무 귀엽다.


가끔 주방에 몰래 들어와 매트에 오줌을 싸서 영역 표시를 한다.

내가 뒤늦게 발견하고 목소리를 키워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하다 싶으면 ‘가짜 재채기’를 한다. 재채기가 나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상황을 바꾸려고 헛재채기를 한다.


이토록 섬세한 감정을 가진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데 어찌 ‘반려견’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실 고백할 것이 있다. 재롱이가 최근까지도 가끔 영역 표시를 한다고 안방과 화장실 매트 위에 오줌을 흠뻑 싼다. 그럴때 훈련시킨다는 이유로 케이지에 강제로 가두어 문을 닫고는 오랫동안 열어주지 않았다. 나오려고 하면 완력으로 막고 문을 매몰차게 닫아 걸었다.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라고. 그러면 슬픈 표정을 짓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였는지 문을 열어 주어도 나오지 않는다.


만일 우리 아이가 오줌 쌌다면 방에 가두어 놓지 않는데 왜 그랬을까? 나와 함께 사는 생명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인종이나 성별, 피부색깔이 다르다고 차별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안다. 흑인이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것은 부도덕하다. 그러나 종에 대한 차별, 동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 뒤에 편견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인은 삼라만상 모든 대상을 인격적으로 관찰하고 소통한다. 심지어 개구리에게도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얘기하는 시인이 있다. 오늘 신문에서 본 김사인 시인의 "미안한 일"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Puppy License” 라는 게 있다. 생후 4개월에서 6개월 된 어린 강아지는 무슨 실수를 하던 혼내지 않도록 하자는 의미이다. 우리가 간난 아이가 뭔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야단치지 않는 것과 같은 뜻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가 반려견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눈으로 보면서 자란다.


우리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우리 어르신들은 개는 바깥에서 묶어 키워야 하고, 집 지키고 사람이 먹고 남은 밥을 처리하는 짐승일 뿐 사람과 함께 생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그렇게 알고 자랐다. 저녁에 으슥한 공터에서 진짜 개 패듯이 패는 장면을 보고 놀라면서 컸다. 그렇게 해야 살코기가 부드럽다고 하는 것은 나중에 들었다. 한때 개고기를 보신탕이라고 한여름에 가끔씩 먹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때였나,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의 항의에 식문화 차이라고 합리화하기에는 지금도 낯이 붉어진다.


‘Pet Factory’도 없어져야 한다. 국내는 약 90퍼센트의 개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다는 조사가 있다. 돈벌이를 위해 강아지를 사육하고 교배 시켜 대량생산을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문제다. 각 가정에서 키우면서 번식기에 짝을 짓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에는 많은 책임이 따라온다.


내 생활의 일부를 강아지와 함께 나눌 것을 각오해야 한다. 아니다, 살면서 함께 즐기면 된다. 말 그대로 ‘반려견’이다. 외로우니까 강아지라도 키워보자는 생각은 금물이다. 아내가 재롱이를 데리고 서재에 들어오면서 “재롱이는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라고 한다. “그게 뭐지?” 궁금해서 묻는다.


“단지 사랑받기 위한 것..”


이라고 아내가 답한다.

맞다.

키워보니 온 몸으로 공감한다.


사람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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