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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와 니체와의 만남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by 엄재균

처음 본 느낌은 ‘이게 뭐지?’


뭉크의 대표작인 <절규>라는 그림을 보았던 기억이다. 왜 이런 기괴한 얼굴을 그렸을까? 왜 이 그림이 그렇게 유명할까? 괴기스럽기까지 한 그림이었다. 무슨 미학적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노란빛이 섞인 붉게 물들어 불안한 느낌을 주는 석양을 배경으로, 암울한 느낌의 감청색의 절벽처럼 보이는 형상을 뒤로하고 해골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절망하는 모습이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뭉크는 무엇을 그리려고 했을까?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불안, 공포와 절망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한 화가가 없었다. 뭉크는 당시 공황장애를 앓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뭉크는 그 불안과 공포를 처음으로 캔버스에 표현한 화가였다.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에 나온 그 사람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어디에서 왔을까?

진화생물학자는 “불안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진화하면서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다.”라고 한다. 인류의 조상이 초원에서 포식자들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항상 경계를 해야 한다. 즐거운 순간을 오래 누리면 한 순간 맹수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사냥 후에도 순간의 즐거움만 느끼도록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엔도르핀이 분비되고는 바로 원래의 경계의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 성행위의 쾌락도 짧은 순간만 경험하도록 허용한 이유다. 오랫동안 즐거움에 빠지면 포식자에 먹힐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절규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우리는 삶을 계획하고 노력하지만 생은 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하지만 내가 생각한 대로 몸은 따라오지 않는다. 그나마 건강을 위해 시작한 다이어트와 운동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원래대로 돌아온다. 몸과 마음은 늘 따로 논다.

경제적인 이유로 미래는 항상 불안하다. 삶이 내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을 때 무기력이 찾아온다. 무기력도 학습이 되고 결국은 습관이 된다. ‘난 안돼’, ‘난 실패자야’라는 낙인을 찍고는 포기를 반복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불면증, 공황장애와 우울증, 강박증, 공포증, 불안증과 고독을 겪으면서 허무주의에 빠져 든다. 뭉크의 그림처럼 ‘절규’를 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이다.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포항공대 이진우 교수가 쓴 《니체의 인생 강의》를 읽으면서 니체의 철학과 뭉크의 그림을 다시 찾았다. 노르웨이 화가인 에드바르 뭉크는 니체를 만난 적은 없지만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니체와 뭉크는 공통적으로 어릴 때부터 가족의 죽음과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니체 철학은 삶 그 자체였기 때문에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아직도 유효하다. 니체와 뭉크가 살았던 19세기, 봉건제는 이미 무너졌고 시민계급이 등장했다.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과학이 세상을 압도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신을 믿으면서 ‘지금 이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 ‘나중 그곳’에서의 영생을 꿈꾸었다. 종교와 사회규범은 인간 욕망을 회피하고 죄악시하였다. 하지만 천국은 멀고 현실은 가까워 사람들은 현세의 기복을 위해 종교를 믿었다. 니체가 죽은 지 122년이 지난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것이다. 신의 죽음을 선포한 인간은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절대적 신에 의지할 수도 없는 불안한 존재가 되었다. 불안한 존재인 내가 ‘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니체는 가르쳤다. “아모르파티 -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믿을 것은 너 자신이고 너 자신이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 스스로를 극복하는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욕망을 드러내고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예술은 그 길을 미리 보여준다. 예술은 인간의 어두운 감정과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우리의 현존재를 확인시킨다. 인생은 항상 비극적 모순과 고통을 겪으면서 결국 죽음을 맞는다. 뭉크는 인간의 근원적 모순에 고통을 겪었고 사랑의 아픔도 당해야 했다. 어릴 때 누이와 어머니를 잃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류머티즘과 우울증, 대인기피증으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며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지고 과음과 불안증세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크는 그림을 통해 모든 고통과 공포를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고독과 허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뭉크는 자신이 겪은 불안한 내면을 캔버스 위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스스로 고통을 극복하는 삶을 살았다.


뭉크의 그림은 신의 위대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위해 그린 것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불안과 공포의 순간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인간 내면의 감정을 화폭으로 드러낸 뭉크는 모든 전통과 종교를 부숴버리고 인간의 실존 그 자체만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니체와 뭉크는 통한다. 뭉크가 니체의 사상을 존중하고 그의 초상화를 그린 이유이기도 하다.

<니체의 초상화, 에드바르 뭉크 작>

지금은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다. 종교와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600년을 지탱해온 가부장제, 결혼, 부부, 부자, 사회적 관계에서 규범이 허물어지고 있다. 사라져 버린 공간에 새로운 사상과 권력이 채워지고 있다. 개인화와 자본권력이다.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 개인주의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아직 성숙하지도 체화되지도 못한 채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면서 욕망의 노예로 살고 있다. 삶의 모든 가치가 빠르게 변하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직 희망은 있다. 자신의 한계와 습관을 극복하고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도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모든 인간은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뉜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자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나온 글이다.


나는 노예인가? 자유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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