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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지금 이 순간,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by 엄재균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에 활기가 넘친다.

역시 학교는 학생들이 모이고 왁자지껄해야 학교다운 맛이 난다. 이번 신학기부터는 대형 교양수업은 비대면으로 진행하지만 전공과목은 거의 대면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나 역시 오랜만에 교실에서 학생들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강의를 하니 약간은 흥분도 되고 기분도 상쾌하다. 학생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정은 잘 읽을 수 없지만 쉬는 시간에 옆 학생들과 얘기하고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았다.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 친구와 관계를 맺고 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학습하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복학생 한 명이 메일로 면담을 신청하여 연구실에서 만났다. 약간은 긴장하면서 얘기를 풀어간다. 대학생활에 회의가 들어 방황을 했고 지금은 자퇴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이제 일 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일단 졸업을 하는 게 어떠냐”라고 권유했다. 자신은 남들이 다 가니까 대학에 왔지만 자기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대로 그냥 살아갈 수 없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행도 하면서 세상 경험을 많이 하고 싶다고. 한참 얘기를 듣고 나니 내가 한 대답이 궁색해졌다.

“일단 졸업을 하면?”

“일단 취업은 해”라는 대답을 할 게 뻔하다.

“취업을 했는데 만족스럽지 않다면?”

“일단은 계속 다니면서 버텨봐”라는 조언이 학생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실이다.


학생의 자퇴 요청을 반대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다만 대학을 다니지 않는 것도 본인이 한 선택이니만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는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 허망한 조언만 했다. 학생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헛헛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청년세대는 직업도 불안정하고 연애마저도 ‘썸’을 타야 할 정도로 애매한 삶을 살고 있다. 취업을 하는 ‘그날이 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희망고문을 한다.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그날이 오면 그때 나는 행복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안정된 직장을 가졌다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그날’을 찾는다.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도 모르면서 매일 자신의 삶을 소진시킨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큰 집에 살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높은 지위와 명예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간다. ‘그날’이 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중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마감’에 쫓기면서 경주마처럼 달리다가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문득 깨닫는다.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 이 질문에 무력감에 빠진다. 원하는 것을 성취한 그날이 와도 삶은 전혀 행복하지 않고 오히려 권태에 빠지거나 무기력만 심해질 뿐이다.


은퇴를 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관계가 사라지는 순간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사실에 더 깊은 허무에 빠진다.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이었나?’라는 회의만 든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핵심 원리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다. 삶은 결승점이 없는 트랙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다. 욕망의 경주에서 죽음만이 마지막 결승 골인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행복이 무엇인지는 질문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남들이 쫓고 있는 삶을 대신 살아갈 뿐이다. 일상의 삶을 의미 없이 견뎌내야 하는 것도 무기력하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소소한 일상에서의 작은 즐거움을 쫓아야 하는 삶도 말처럼 쉽지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일상에서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자만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먼 훗날의 ‘그날’이 아니라 지금 행복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 지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질문하는 사람만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한계와 욕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극복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욕망을 똑바로 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돈이 많다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건강하다고 행복한 삶을 살 수는 없다. 나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수 있을 때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삶에 대한 태도와 인격적 덕성으로 인한 습관을 통해 행복은 실현된다, 행복은 일의 성취와 사회적 지위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아니라 일상의 삶의 과정에서 느낄 수 있다. 예컨대 예술작품을 보면서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해외 미술관을 직접 갈 수도 없다. 대신 Google Arts and Culture를 통해 전 세계 미술관을 온라인으로 방문한다. <스트리트뷰>로 보면 마치 현지에서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다. <증강현실>로는 내 방에 진열한 것처럼 그림을 생동감있게 본다. 오늘은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레 미술관으로 가볼까?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인 <키스>를 볼 때면 매혹적인 순간의 낭만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첫사랑 키스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있다. 연인이 키스하는 몽환적인 순간, 에로티시즘은 극치에 달하면서 시간은 멈춰 섰고 온 세상은 황금빛으로 변화는 감미로운 순간이다. 연인의 황홀한 키스의 순간을 포착한 클림트의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사랑의 판타지를 꿈꾸게 한다.

클림트는 찬란한 황금빛의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여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19세기 후반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제국시대에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 성과 사랑을 에로틱하게 표현하였다. 인간의 깊은 무의식에 잠재한 성적 본능을 과감하게 끄집어내었다. 그림 속 남녀가 키스하는 찰나의 순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영원할 것처럼 로맨틱하게 보인다. 클림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여성편력이 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의 한계를 예술로 극복하면서 자신의 욕망과 삶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우리의 시선은 몽환적인 여인의 얼굴과 황금빛 옷에 집중된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려 여인의 발아래로 간다. 색다른 모습이 보인다. 여인의 발아래는 무한의 절벽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인은 황금빛 배경의 아름다운 꽃밭 아래 절벽 가장자리에서 발로 힘겹게 버티면서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여인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도 함께 보인다. 삶의 이중성을 느낀다.


여인이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매혹적인 찰나의 순간에도 불안과 두려움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클림트는 그림에서 표현했다. 인간은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인간이 서 있는 삶의 토대는 늘 불안하고 부서지기가 쉽다. 사랑의 감정도 변질되고 퇴색되어 버릴 수 있다. 삶은 불안하고 뜨거웠던 사랑의 감정마저도 변할 수 있지만 사랑의 순간만은 그림으로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다.

예술 작품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심미적 경험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삶은 자신의 다양한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끊임없이 극복하면서 자신을 고양시키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나의 욕망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삶을 이야기로 진솔하게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날은 오지 않는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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