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움직이는 예술
유튜브를 넘기다 <4월 놓치지 말아야 할 전시>라는 제목에 눈길이 갔다.
'오랜만에 전시회를 가볼까?'라는 마음으로 하나씩 읽어나갔다.
첫 번째 전시가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이다. 독일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에 소장된 피카소 작품을 포함하여 샤갈, 앤디 워홀, 칸딘스키, 잭슨 블록 등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전시를 소개한 것이 <에드워드 호퍼> 전이다. 언젠가 한 번은 본 듯한 그림이 나온다. 서울시립미술관 뉴욕 휘트니미술관과 협업으로 아시아 최초의 호퍼 개인전이라고 한다. 현대인이 겪는 도시 속의 고독과 외로움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호크니와 브리티시 팝아트> 전을 소개한다. 동대문 DDP에서 열리는 전시로 호크니라는 타이틀이 나의 관심을 끌었지만 개인전이 아니라 아쉬웠고, 2019년에 열린 개인전을 보지 못해 서운했지만 다음 기회에 보기로 했다.
'그래 눈에 익숙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From City to Coast> 전시를 예매하기 위해 사이트로 들어가니 이미 얼리버드 티켓은 모두 매진되었다. '벌써?'
아래로 내려가니 '29CM'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예매처에는 아직 남아 있는 티켓이 있다. 얼른 들어가 예매를 하고는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찾아보았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그림인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Nighthawks"는 시카고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이번에는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현대인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뉴욕의 늦은 밤, 카페에는 함께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앉아 있지만 왠지 두 사이에는 외로움이 묻어나 있다. 그 앞쪽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홀로 앉아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다.
바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시점에 도심의 적막하고 우울했던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그림으로 투영되었다. 우린 벌써 그 시간을 잊어버렸다. 무려 3년 이상의 시간 동안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으로 마주치는 사람을 보면서 가능한 떨어져 지내기를 원했다. 지금은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모습으로 활발하게 모여 얘기하고 여행을 다닌다.
에드워드 호퍼가 표현한 1942년 뉴욕 밤거리와 카페의 모습은 현대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현대 도시인은 옛날 노예처럼 주인에 의해 착취당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착취한다. 기꺼이 자신을 상품화하고 자신을 소외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대로 쉬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성찰할 시간조차 없다. 새벽부터 인플루언서와 셀렙들이 세밀하게 기획한 '모닝 미라클’을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따라 해 보지만, 결국은 돈과 욕망을 쫓아 밤낮이 없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육체와 영혼까지 갉아먹고 있다.
왜 현대인은 스스로 자신을 착취할까?
자본권력이 스스로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자기 착취를 하기 때문이다. 자본에 종속된 대중 역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권리를 외치면서 자본권력과 함께 강박적으로 일과 놀이에 중독되면서 결국 소모적인 삶에 자신의 몸과 영혼까지 지쳐버리고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가 우울증, 공황장애, 수면장애 등 각종 신경증 증세에 시달리는 이유다.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잃어버린 휴식의 시간을 누리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그곳에서도 즐길 시간조차 없다. SNS에 올릴 사진부터 찍고,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포스팅을 위해 먹고 돌아다닌다. SNS 인플루언서의 팔로우가 되면서 인플루언서가 일상에서 연출하면서 소비한 상품, 여행, 건강, 피티니스, 다이어트와 예능 프로그램까지 모방하면서 소비한다. 소비를 통해 인플루언서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려 하고 소비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지름길이 되었다.
또 다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보인다. "자동판매기 - Automat"라는 그림에서는 여성 혼자서 늦은 저녁에 배경이 어두운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Automat은 당시 자동판매기로 음식과 음료를 팔던 식당을 말한다. 이 작품도 미국 아이오와 드모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어 이번 서울 전시에서는 볼 수 없다. 1927년 작품이니까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시대의 카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 혼자 앉아 있는 여인의 분위기에서 우리가 겪었던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던 모습이 오버랩되어 떠오른다.
어떻게 한 시대의 모습을 그림으로 이렇게 적확하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코로나로 인해 사람과 거리를 두고 낯설게 떨어져 앉는 모습, 카페 안의 백색소음의 음악이 흐르는 분위기에 각자 혼자서 뭔가를 하고 있지만 공허한 느낌, 버스나 지하철 혹은 도심의 길거리에서는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 스마폰을 보면서 마치 좀비들이 걸어 다니는 느낌의 광경 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겪었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대상을 어떻게 한 폭의 그림에 담을 수 있을까. 그림이 아니면 우리 시대의 삭막한 모습을 강렬하고 극적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에드워드 호퍼는 말했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공황이 지나 간 후, 1930 ~ 1940년대 역동적이지만 모두 지쳐서 허우적거리는 뉴욕 거리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호퍼는 냉소적이고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대의 상황을 호퍼는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여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의 어두운 감정까지 포착하여 그것을 이전과는 다른 사실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 에드워드 호퍼는 현대 도시인의 내면의 상실, 고독과 단절을 순간적으로 포획하여 빛과 어둠 그리고 공간을 이용하여 지금 우리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현대인은 이 그림을 보면서
나는 더 이상 홀로 외롭다고 느끼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대인의 고독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림을 통해 다시 보게 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또 있다.
영상을 통해서다.
여기 특별한 영상을 추천을 받아 유튜브를 통해 짧게나마 감상했다. 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사진작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Louie Schwartzberg이 감독한 "Moving Art"라는 영상이다. 꽃이 피는 장면을 저속 촬영기법(Time Lapse)을 통해 어떻게 꽃이 활짝 피는 지를 눈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매 초당 캡처한 영상을 초당 30 프레임으로 재생하면 그 결과는 30배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꽃이 피는 순간의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저속촬영을 이용하면 꽃이 피고 버섯이 자라는 긴 시간을 순간의 장면으로 볼 수 있다.
Louie Schwartzberg는 4분간 꽃이 피는 장면을 찍기 위해 무려 한 달간 계속 촬영했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는 한순간에 꽃이 피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도 이런 저속촬영 영상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슬로모션도 가능하다.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순간을 촬영함으로써 자연계에서 함께 생존하고 있는 꽃과 벌, 새들이 우리 인간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영상이다.
생명체의 순간 움직임을 포착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준다.
심지어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우리를 차분하게 명상에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자연계의 보이지 않는 기적들 : Hidden miracles of the natural world" 타이틀을 가진 또 다른 영상은 저속촬영을 통해 버섯이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식물이 깊은 숲의 땅 속에서 나와 햇빛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저속촬영을 통해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몸속에 함께 살고 있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까지 보여줌으로써 인간은 미생물과도 공존하고 있는 사실을 눈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상을 보면서 자연과 우리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내가 숨을 쉬면서 살아있는 지금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이켜본다.
봄날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황사와 미세먼지 속을 헤매고 난 뒤에 깨닫는다. 맑은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지난 3년간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가 함께 같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만나고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우리는 항상 부재와 결핍을 통해서만이 그 존재의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는 매일 숨을 쉬면서 살아간다. 호흡이 어떻게 하여 생명 현상을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맑은 공기를 통해 숨을 들이쉬면서 허파를 통해 들어온 산소가 체내의 혈액에 흡수되고, 혈액을 통해 온몸의 세포로 산소를 공급하는 과정을 차분히 생각하면 기적적이지 않은가? 세포의 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에서 세포호흡을 통해 산소와 함께 우리가 먹은 음식에서 소화 효소에 의해 만든 포도당이 분자활동과 화학반응을 거치면서 에너지를 생성한다. 이 에너지로 인해 우리가 매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호흡이 잠시라도 멈추어 산소가 세포로 공급되지 않는 그 들숨과 날숨이 멈추는 순간, 뇌세포는 작동을 멈추고 에너지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하면서 생명체는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숨 쉬는 이 들숨과 날숨이 얼마나 귀한 생명 현상인지 다시 생각한다.
기적과 같은 일들이 매일 이 순간에도 내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산다. 왜냐고?
어제도 아무 탈이 없이 지냈고 오늘 이 순간도 당연하다고 느끼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흔해빠지고 당연하기 때문에 그 고마움을 잊고 산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에 고마움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그나마 황사가 지나고 맑은 하늘을 보는 그 순간뿐이다. 그리고 또 잊고 산다.
만약 지금 마실 물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될까?
매일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면?
내가 근육위축증으로 인해 두 발로 걸을 수 없고 손가락 하나도 꼼짝일 수 없다면?
황반변성 등의 질병으로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돌발성 난청으로 인해 들을 수 없다거나 메니에르병으로 어지러움증으로 인해 서 있을 수도 없다면?
후두암에 걸려 더 이상 말 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기적이라 생각한다.
내가 들숨과 날숨을 쉴 수 있고 사물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다는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내가 매일 만나는 가족과 학생들, 그리고 친구들, 동료들의 얼굴에는 각자의 삶에서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다. 그 사람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은 아마도 우주와 연결하는 관문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위대한 예술가의 그림을 통해 사진작가의 영상을 보면서 시인이 쓴 시를 감상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기적과 같은 사건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선가 들은 다음의 글이 떠오른다.
오늘 이 시간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인 것에 감사하다.
오늘 이 시간은 어제와 같지 않고 그저께의 시간과도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간이 나에게 소중하게 주어진 것이다.
산책을 하며 걸으면서 푸른 하늘을 보면서 맑은 공기를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하면서 몸으로 느낀다.
보이지 않는 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