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삶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가고..
방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한다.
'약속한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과일을 먹던 차에 허겁지겁 입에 넣고 있는데 손님이 들어온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인사하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누군지 분간이 어려웠다. 지난해 졸업한 학생이라고 소개하는데 마스크 때문인지 언뜻 이름이 떠 오르지 않았다. 졸업 후 공공기관에 취업준비를 하다 포기하고 며칠 전 회사 면접을 보고 어제 합격 통지를 받았다고 했다. 학과에 볼일을 보러 왔다가 인사차 들렀다. 취직을 축하하면서 그동안 취업 때문에 고생한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회사에서 자신이 맡을 업무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고 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늘 불안하다고 말한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내 젊은 시절의 불안이 떠 올랐다.
미래가 확실한 것이 없으니 불안한 것이 당연할 것이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 실패가 두려워서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한 것이 많았다. “자신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 놓고 실패도 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야지요..."라고 내가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 있는 마음에 조언했지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헛헛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 말은 내 젊은 시절의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아니 지금의 나 자신에게도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자신에 대한 가능성은 아무도 모른다. 자신조차도 시도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도전하면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나 역시 늦은 나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다. 딸이 디저트 카페를 열어 가끔 카페에 가면 우두 커니 있기보다는 커피라도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커피 바리스타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드립커피 바리스타 2급을 따고 다시 에스프레소 라테 아트 2급, 그리고 지금은 1급 자격시험에 도전하고 있다. 아직 튤립도 잘 그리지 못하지만 배우는 과정이 즐겁고 성취감도 있다.
지금 난 60대를 지나가고 있다.
처음 환갑을 맞으면서 '내가 60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서른'이라고 스스로 위로해 봐야 60대 나이는 어디 없어지지 않고 무심하게 흘러갔다.
아마 70대 선배님은 나보고,
“자네, 그때가 제일 좋은 날일세~”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80대 대선배님은 다시 70대 한테 '내가 70만 되어도 뭔가...'와 같은 얘기를 할 것 같다. 모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시간이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지만,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정말 든다. 왜 그런 생각이 들까?
더 이상 나를 들볶지 않아도 된다. 뭔가를 쟁취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내가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해도 남이 비난하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다. 내 삶에서 이렇게 마음이 자유로웠던 시절이 있었던가?
혹, 누군가 "뭘 그렇게 뒤늦게 배워서 뭘 하려고?",
”잘 났군 잘 났어~“라고 비아냥거리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난 그냥 웃지요~'라고 넘어갈 수 있는 너그러움도 생긴 것 같다.
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무료 알바로 봉사하면서 라테아트를 만들어 손님에게 서비스하고 싶다. 나도 즐겁고 딸도 일손을 덜고 손님도 내가 정성스레 내린 카푸치노를 즐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손님이 없을 때는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은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아이스라테를 가끔은 따뜻한 카푸치노도 마시고 싶다.
캘리그래프 강의도 집 근처 청소년수련관에 등록하여 배우고 있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많다. 커피도 여기서 배운다. 캘리그래프를 계속 배워 책을 내는 기회가 생긴다면 내가 그린 캘리그래프를 책 내용에 담고 싶다. 프로페셔널의 손이 아니라 투박하지만 내 손으로 그린 그림과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아직 선생님의 그림과 글을 보고 따라 그리고 있지만 배우는 것이 즐겁다.
올해 봄은 이상기온이 더 심하다.
봄의 평균기온이 높아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자 말자 함께 목련, 벚꽃이 피더니 5월에 피어야 할 철쭉까지 '나도 나도~' 하면서 대열에 참여한다. 지구가 이상기온에 몸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안타깝다.
최근에는 산책을 하면서 꽃구경도 하고 유튜브로 강의도 듣고 음악까지 들으면서 걸었다.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했다는 만족감이 들었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돌이켜보면 뭔가 많이 했는데 남는 게 별로 없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렇지?'
돌이켜 본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했지만 하나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어폰을 통해 유명 강의를 들으면서 걷다 보면 스치며 흘러가는 탄천의 물소리, 꽃망울이 터지는 모습, 수줍게 피어난 보라색 제비꽃, 새파란 민들레 새순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이어폰으로 TED 강의를 들으면서는 내 주변의 자연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강의를 옳게 소화했던 것도 아니었다. 좋아하던 음악도 집중하지 않으면 백색소음으로 들린다.
그렇구나..!
우리는 결코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없다. 멀티태스킹 방식으로 즐길 수 없는 뇌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뇌에서는 계속 모드를 바꾸면서 강의를 듣고 또 잽싸게 모드를 바꾸어 다시 경치를 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다. 그러니 한 가지도 제대로 즐길 수 없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뇌는 계속 모드를 바꾸어하기 때문에 에너지는 더 소모되고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이제는 산책을 할 때는 걷는 ‘그 순간’에 집중하려고 한다. 미래를 위해 다른 것을 더 하려고 ‘이 순간’을 자당 잡고 싶지는 않다. 걸으면서 오로지 내 몸과 마음을 살핀다. 생각의 고리를 연결하여 떠오른 생각들을 나름대로 정리한다. 강의를 듣고 싶으면 중간에 산길 벤치에 앉아 ‘그 순간’에는 강의만 듣는다. 이 글에 대한 생각도 그렇게 홀로 있으면서 나에게 집중할 때 떠 올랐다.
음악을 듣고 싶으면 호숫가 벤치에 앉아 ‘그 순간’에는 음악에만 집중하며 듣는다. 가수의 아름다운 음색이 내 마음을 울리고 가사가 내 가슴으로 들어와 나를 감동시킨다. 그래 맞다! 좋은 음식을 먹을 때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예능이나 뉴스를 보면 제대로 그 요리의 진정한 맛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요리 음식도 먹고 동시에 예능도 즐기고 뉴스도 듣는 것'과 같은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제대로 즐길 수 없지만 마치 모두 한 것 같은 착각만 들뿐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무엇을 맛있게 먹었는지, 무슨 재미난 예능을 보았는지, 가족과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결코 그 순간을 음미하고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기억에 남지 않고 ‘그 순간’을 느끼고 즐기지 못하는 시간이 계속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것은 큰 홍수가 난 물결에 따라 휩쓸려 가는 돼지처럼 열심히 허우적거리지만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해가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러니에 빠져 있지는 않았는가?
'한 번에 한 가지에만 그 순간에
집중한다'라는 마음으로.
공원에 나가니 휴일이라 사람이 많았다.
호숫가를 따라 피어났던 벚꽃이 강한 바람에 날려 속절없이 흩날린다. 그 고운 꽃잎이 호숫가 수면을 하얗게 흰 눈처럼 덮는다. 그 모진 겨울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온몸으로 떨어진 슬픈 동백꽃 모습을 볼 때와는 다르다. 벚꽃은 피어있을 때나 떨어질 때나 모두 아름답고 화려했다.
그렇구나...
애달피 흩날리는 벚꽃을 보고
'봄이 왔다가 벌써 가고 있구나'를
느낀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 온 줄 알았네'
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공감이 된다. 꽃에 내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내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일 따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줄 모르다가 어느 날 훌쩍 멀리 떠나가면 그제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느낀다.
그래서
'곁에 있을 때 잘해~!'라고 하는구나
카페에서 맞은편에 앉은 연인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스마트폰만 열심히 본다면 그 연인의 관계는 늦봄의 벚꽃처럼 몸과 마음이 서로 흩어질 뿐이다. 단지 몸만 같이 있을 뿐 마음은 흩어지고 그 소중한 순간은 사라지고 관계는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동백꽃이 나무 아래 붉게 물들어 있을 때
그 때야 알아차린다.
'아, 그 춥고 모진 겨울이 가는구나'
벚꽃이 바람에 속절없이 흩날리던 그날,
그제야 느낀다.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사랑했던 연인이 떠나고 난 다음에야,
그 님의 향기가 다시 진하게 사무치게
떠오른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도 거칠고 마르면서 윤기는 없어지지만 빨갛게 노랗게 알록달록 예쁘게 단풍 물이 든다.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더 보기 좋은 것'
나도 단풍처럼 멋있게 잘 물들고 싶다. 주름살이 있으면 어떠랴? 말이 입에서 맴돌다 어눌해지고 몸이 둔해지면 또 어떠랴? 더 단순하게 생각하고 천천히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 좋을게다. ‘이 순간’의 시간은 켜켜이 쌓이면서 내일이 곧 어제가 되고 과거가 되고 결국은 운명이 되면서 생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갈 것이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지고 다시 단풍으로 곱게 물듯이,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듯이 나도 그렇게 매 계절마다 죽고 다시 피어나면서 존재하고 싶다.
나에게 주어진 만물이 숙성하는 가을의 시간, 이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
내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이
벚꽃처럼 화려하게 피었다가
단풍처럼 그렇게 물들어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