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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재균 Jul 06. 2023

깊은 감동이 있는 스토리텔링 - 편지

별이 빛나는 밤에...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지 못해고 그 대신 내 얼굴을 그리기 위해 일부러 좀 좋은 거울을 샀다. 내 얼굴색을 칠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면 다른 사람도 쉽게 그릴 수 있겠지.”    

 

아주 가난했던 화가인 듯하다.


“내 그림의 가격이 경비를 충당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경비를 넘어선다면 정말 좋겠지만. 지금까지 사용한 돈이 얼마인지 생각해 보면..., 아, 그래, 꼭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돈을 쓰는 것에 대해 네가 불평한 적이 없었지. <중략> 너무 힘들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말을 해라. 즉시 유화를 그만두고 경비가 덜 드는 데생을 하마.”     


얼마나 돈이 없으면 모델도 구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그렇게 많이 그렸을까?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돈을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누가 이렇게 아쉬운 부탁을 할까?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이제는 아주 대놓고 자신의 ‘열정 충만’을 강조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은 팔리지 않아 돈을 얻어 쓰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넘친다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들린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는 건지...


누가 쓴 편지 글일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제 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삶,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     


지금은 보잘것없이 보이는 나의 그림 실력을 세상이 몰라주지만 언제 가는 ‘짠~’하고 알아주리라는 자기애가 강한 믿음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글쎄, 세상이 외면하는 화가는 분명해 보이지만 마음이 깊고 따뜻한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하고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그림조차도 그릴 수 없는 화가이다.


이 화가는 누구일까?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다.    

 

빈센트 반 고흐는 태어나면서부터 불행했던 삶을 살았다. 부모는 자신이 태어나기 일 년 전, 태어나면서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집 부근에 형의 무덤이 있는 곳을 자주 지나치면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묘비명을 보고 고흐는 자신의 이름에 붙어 다니는 형의 이름에서 죽음을 항상 생각했으리라.      

 

아버지와 갈등,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고 무수한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던 고흐의 삶을 생각한다.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모아 책으로 출간한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난 후, 난 고흐를 인간적으로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화가였다.  

    

약 700통 이상의 편지를 동생에게 보냈다. 편지에는 자주 돈을 부쳐달라고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지만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테오 또한 편지를 통해 형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전했다.

      

동생 테오가 형 빈센트에게 보내는 전폭적인 지지와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불행했던 삶의 스토리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과연 이렇게 유명해졌을 것인가? 편지는 한 편의 시나리오처럼 드라마틱하였다. 편지에 쓰인 글은 좌절, 기쁨, 열정, 철학적인 성찰을 담은 햔 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고흐가 겪은 아픔과 삶의 고통을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 고통을 해바라기를 그리면서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표현한 그 감정을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슬프고 애잔한 스토리텔링이 있었기에 관람자는 그의 그림에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작년 여름, 딸이 포스트닥 연구원으로 일하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방문했다. 그곳에 한 달 머물면서 암스테르담의 고흐미술관을 방문했다. 오로지 고흐의 그림을 보기 위해 갔다. 2003년에 방문했던 고흐미술관은 일본인 건축가인 기쇼 구로가와가 증축한 타원형 건물로 현대적 감각을 지닌 단아한 모습으로 새로이 단장했다. 건물 이름도 ‘구로가와 윙’으로 불릴 만큼 일본문화의 영향력이 대단하다. 미술관 층계를 오르내리면서 고흐 그림을 보는 동안 편지에 담긴 빈센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살아생전에 자신이 그린 수 백점의 그림 중에 <아를의 붉은 포도밭>, 단 한 점만 팔려서 생활고에 힘들어했다. 빈센트는 뇌전증을 앓고 있었으며 가끔 환각과 심한 조울증으로 인한 경련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결국에는 정신병동에 입원까지 했던 불운한 모습이 떠오른다. 고흐의 그림을 볼 때면 항상 애틋한 마음이 들면서 그림에 쉽게 동화된다.      


왜 그럴까?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88년 푸쉬킨 미술관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문상객들이 영정 앞에서 슬피 우는 모습을 가끔 본다.    

 

물론 고인의 생전 기억이 떠올라 울기도 하지만 자신도 언제 가는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슬퍼 울기도 한다. 고인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불행했던 빈센트의 삶이 편지를 통해 우리에게 ‘스토리텔링’으로 전해주기 때문에 그림 속의 이미지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지금은 위대한 화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화상과 동료들로부터 외면받으면서 ‘얼마나 슬프고 괴로웠을까?’라고 감정이입이 된다.     


화가의 고통이 관람자의 슬픔과 동일시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누구나 나름대로 자기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슬픈 이야기’에 감응한다.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빈센트와 나 자신의 과거 아픔과 고통을 떠올리면서 그 그림에 몰입한다. 동생 테오와 나눈 애잔한 스토리가 없었다면 고흐 작품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특히 그 사람이 비운의 예술가라면 그 작품과 함께 삶의 이야기에 대한 감동은 더욱 증폭된다.     


화가들은 왜 자화상을 그리는 것을 즐겼을까? 경제적 이유 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우리 또한 비슷한 이유로 셀카를 찍어댄다.    

  

빈센트는 얼굴의 표정에서 인간 내면의 강렬한 울림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초상화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 흥미로운 소재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돈도 들지 않기에 더욱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는 43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단톡방에 매일 명화와 함께 해설이 있는 “Morning Gallery"에서 제공하는 글을 올리는 친구가 있다. 친구가 단톡방 모임의 회장이 되고 난 다음부터 회원들의 예술적 심미안을 고양할 목적으로 아침마다 단톡방에 올린다. 매일 아침마다 다양하고 멋진 그림을 볼 수 있어 즐거웠다. 고마운 친구다.     


최근에 비를 주제로 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올라왔다. 카유보트가 그린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과 고흐가 일본 '우키요에'풍의 목판화를 보고 그대로 따라 그린 <빗속의 다리>는 눈에 익숙한 그림이었다.

         

<파리의 거리, 비 오는 거리> 1877년,   <빗속의 다리> 1887년

               

우리의 슬픈 영혼, 빈센트를 다시 생각한다.     


고흐는 고갱과 프랑스 남부지방의 아를에 함께 지내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방법과 지향점이 달라 논쟁을 벌이다 고갱이 파리로 떠나버렸다. 그날 빈센트는 결국 자신의 귀를 잘랐다. 귓불만 자르긴 했지만 그 기이한 행동까지 한 모습을 상상하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귀를 자른 자화상>이라는 그림으로 그렸다. 고갱과의 갈등으로 인한 내면의 깊은 불안감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귀를 자른 자화상>1889년 1월, 코톨드 갤러리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난 모델이 없을 때 나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일부러 좋은 거울을 샀다’고 편지를 보면 거울을 사용하여 자신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빈센트는 계속되는 우울증과 함께 발작증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그림에 몰두하려 했는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빈센트는 자화상을 통해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한 내면을 표현했지만 도덕적 진지함도 함께 보인다. 동생 테오도 빈센트가 죽은 지 육 개월 만에 형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본인 또한 고통받았던 우울증으로 인해 형을 따라 '별이 빛나는 밤'의 세상으로 떠난다.     


빈센트의 위대함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결정적인 인물이 있었다.


<아몬드 나무> 동생 테오와 요한나 사이에 태어날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은 그림, 1890년, 고흐미술관 소장


동생 테오의 부인, 요한나이다.     


“테오는 내게 예술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아니,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고 함이 옳다. 그는 내게 아이 말고도 또 하나의 유산을 물려줬다. 빈센트의 작품, 나는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 가치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 테오와 빈센트가 평생 동안 모은 이 보물들을 아기를 위해서라도 잘 보존해야겠다. 그게 나의 일이다.” [요한나의 일기. 1891년 11월]     


이런 결심이 있었기에 빈센트의 그림이 대중에게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요한나는 자신의 아들 이름도 큰아버지와 같은 빈센트 빌럼 반 고흐로 작명하여 가족의 귀중한 유산을 준비한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를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엮어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출간했다. 고흐의 그림과 함께 형제간의 비극적이지만  ‘감동의 스토리’를 통해 대중들은 그제야 고흐의 광기 어린 삶과 예술혼을 엿볼 수 있었다. 한 편의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이 담긴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요한나의 아들은 큰아버지 반 고흐와 아버지 테오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그림을 네덜란드 정부에 기부했다. 네덜란드는 그의 기부에 화답을 하였다. 1973년 조카 고흐가 여든세 살이 되는 해, 고흐는 큰아버지를 기념하는 고흐미술관의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고흐의 동생 테오와 그의 아내 요한나 그리고 그녀의 아들이자 고흐 조카는 자신들의 가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국가에 커다란 부와 유산을 남겨주었다.      


반 고흐를 추모한 노래도 있다. 돈 맥클린이 작사 작곡한 <빈센트>이다. 그 역시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담아 그의 삶과 죽음을 노래한 곡이다.  

    

“별이, 별이 빛나는 밤에

당신의 팔레트를 푸른색과 검은색으로 칠해봐요

한 여름날의 밖을 내다봐요

내 영혼의 어둠을 아는 그 눈들로요


<중략>     


이제 저는 이해하겠어요

당신이 제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요

그리고 얼마나 당신이 제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는지요     

그들은 듣지 못할 거고, 알지 못할 거예요

아마 지금쯤 듣겠네요 “          




고흐와는 비슷한 듯하지만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진 화가가 있다.   

   

아래 그림과 같이 같은 해바라기를 보고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그릴 수 있을까? 왼쪽의 해바라기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오른쪽에 화려해 보이는 해바라기는 누가 그렸을까? 맨 오른쪽 해바라기는 왠지 어둡고 시들고 말라비틀어져가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그렸을까?      


<빈센트가 본 해바라기> <클림트가 본 해바라기>  <에곤 실레가 본 해바라기>



화려한 해바라기는 클림트가 그렸고 그 옆의 거친 해바라기는 에곤 실레가 그렸다. 크림트와 실레의 특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고흐는 실레가 1890년 6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 달 뒤 프랑스 오베르에서 총으로 자살하여 생을 마감한다.     


에곤 실레 역시 빈센트 반 고흐와는 다른 이유로 자화상을 거의 100점을 그렸다. 자아가 강한 실레는 거울 앞에서 갖가지 포즈를 취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타고난 나르시시스트였다.


<팔을 머리 뒤로 튼 자화상>, 1910


에곤 실레가 그린 자화상은 사뭇 다르다. 육체적인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에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만든다. 그 불안하고 저항하는 듯한 눈빛을 보면서 우리 깊숙이 숨어있는 내면을 드러내준다. 깡마른 몸은 날카롭고 거친 붓 터치로 뒤틀려있고 얼굴도 손으로 비틀면서 정면을 향하는 강한 시선은 불안한 내면을 나타낸다. 한편으로는 예술가의 영혼을 억압하는 기성세대에게 저항하는 반항심도 느낄 수 있다. 자기 존재의 살아있음을 표현한 것도 같다.    

 

“내 마음은 지금 이렇게 불안해!”

“당신도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그것을 내면에 숨기고 있다고?”

“아냐, 나처럼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 봐.!”

“그럼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하고 당당해질 거야”     


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실레는 그림을 보는 관람자를 일부러 불편하게 느끼도록 구도를 왜곡한다. 붓터치도 날카롭고 상당히 거칠게 한다. 실레는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감상자가 불편한 감정이 생기면 실레의 목적이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의도하려고 하는 그림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깊은 내면의 통제할 수 없는 마음까지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학창 시절 미술시간에 아무런 감동도 없이 듣고 외우고 그리고는 잊어버린 ‘표현주의’ 기법이다.      


자화상은 마치 우리가 즐기는 셀카를 왜곡된 각도와 몸동작을 통해 강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셀카로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내면의 불안과 외로움까지 표현하고 있다.     


현대인이 셀카를 많이 찍는 이유도 자기애를 강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표현을 위해 셀카를 찍어 올린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셀카를 찍는다.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확산되었다. 여행을 가서 멋진 경치, 훌륭한 식당에서의 맛있는 음식, 심지어 일상의 생활까지 셀카로 찍어 인스타 혹은 페이스북에 올린다. 음식을 즐기기보다 내가 이런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을 SNS에 자랑하기 위해 멋진 식당을 출입한다. 심지어 여행을 가서 즐기는 것보다 셀카를 찍기 위해 여행을 할 정도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이중의 자화상> 1915년, 개인소장 

<이중의 자아상>을 보면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와 무의식 속의 나를 함께 표현한 것처럼 느낀다. 두 명의 에곤 실레가 그림에 있다. 아래에 있는 실레는 눈을 치켜뜨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적개심마저 들게 한다. 자신의 내면을 향한 불만과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위에 있는 또 다른 실레는 순진하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적개심에 가득 찬 실레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고 있으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나의 모습이 어떠냐?’고 실레는 관람자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당신도 이렇지 않아?’ 묻고 있다.

‘자신을 숨기지 말고 잘 살펴봐 “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마치 시인과 촌장이 부른 <가시나무>의 가사에 나오는 노래를 들려주는 것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현대 뇌과학에서 밝혀낸 중요한 사실은 한 사람 안에 여러 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가사가 맞는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의식은 복수의 자아로 구성되어 있다는 의미다.     


실레의 자화상에서는 내면의 순수한 욕망과 불안하고 분열된 자아상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실레는 그 자아상을 적절히 통합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빈센트와 실레, 이 두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의 모습도 함께 본다. 열정과 희망 그리고 방황과 내적 갈등으로 인해 가시로 가득 찬 청춘은 이제 나이가 들면서 그 가시들이 다 뽑혀나간 줄 알았다.      


세월이 흐르고 삶이 안정되면서 세월의 흔적은 몸에 남을지라도 외연은 중후하고 내면은 평안하고 품격 있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왔다. 하지만 아직도 현실의 욕망과 이상세계 사이에서 헤매는 나를 발견한다. 자아의 욕구를 억압하는 동시대의 윤리에 격렬히 저항하는 에곤 실레의 내면을 보여준 <이중의 자화상>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의 하나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인생은 너무 짧고, 특히 모든 것에 용감히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몇 년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골목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어둑해질 무렵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친구들은 구슬치기, 딱지치기하던 것을 툴툴 털고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우연히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본 기억이 있다.

   

별이 쏟아지는 밤, 

그 하늘은 고흐가 생레미 요양원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이 세상에 소풍 와서 즐겁고 의미있게 보내다가 홀연히 별이 빛나는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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