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더 복서가 매력적인 세 가지 이유
이제 더 이상 강함, 초능력 이런 것으로 어필되는 시대는 지난 것 같습니다. 영화든, 웹툰이든 그리고 장르가 어떻게 되던지 간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세세한 감정 변화와 묘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장기간 사랑받는 작품이 되기 어려운데요.
사실 말이 쉽지 이렇게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캐릭터 하나도 요즘에는 성격과 상황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의 조화도 생각해서 만들어야 하고, 그 성격에 맞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만 합니다. 최근에 한 웹툰에서 댓글로 '저 상황에서 저런 리액션을 하는 게 저 캐릭터 성격에 맞는 것인가'라는 댓글을 보고 소름이 돋았는데요. 이처럼 요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높아져서, 작품의 한 상황을 구성하는 것도 기획을 촘촘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와중에서 네이버 목요일 웹툰 탑 순위에 안착한 웹툰이 있는데요. 복싱이라는 정통 소재를 주인공이 알고 보니 악당일지도 모른다, 라는 새로운 연출로 풀어내는 웹툰입니다. 여기서 이미 아시는 분들은 눈치채셨겠죠. 바로 '더 복서'인데요. 오늘 포스팅에서는 더 복서의 매력포인트를 책과 함께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 포스팅은 네이버 웹툰 더 복서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1. 인물 한 명 한 명의 묘사가 섬세하다
소설이나 만화를 창작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큰 세계관과 핵심 사건을 중심으로 기승전결만 설정한 이후에, 바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2) 캐릭터를 하나하나 설계를 한 후에, 그 캐릭터들을 소설 속 세계관에 풀어놓는다.
지극히 제 개인적인 두 가지 소설 쓰기 방법론인데요. 저는 '더 복서'라는 만화가 두 번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미리 처음과 끝을 정해놓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하나에 대해서 성격 / 외모 / 성장배경 / 주변 인물과 그 관계 등등을 섬세하게 만들어낸 이후에 이렇게 만든 캐릭터들을 한 공간 안에 두는 겁니다. 그때에 생겨나는 케미스트리를 그려낸 만화가 바로 더 복서라고 생각해요.
더 복서의 인물들은 장점과 단점, 가지고 있는 것과 결여된 것이 뚜렷합니다. 맨 첫 번째 빌런으로 등장한 '류백산'이라는 캐릭터는 복싱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습니다. '당연하게 피해야 하는 주먹을 사람들은 왜 피하지 않는 걸까. 아, 내가 너무 뛰어나서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가진 캐릭터로, 초반에 복싱 천재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재능만 믿고 노력하지 않았고, '인재'라는 같은 반 친구를 괴롭히는 인성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그래서일까요, 백산보다 재능의 결이 다른 유에게 가볍게 패배하고, 그 이후 자신이 괴롭혔던 '인재'라는 인물에게도 무시당하게 됩니다. 이후에 아예 마음이 꺾여버려서 깡패로 살게 됩니다.
한 명의 천재가 어떻게 꺾이고, 그 이후에 어떤 감정을 지니는지를 더 복서에서는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내는데요. 이렇게 인물의 감정과 그 감정이 일어나게 된 계기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방식에서 캐릭터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2. 주인공이 알고 보니 악당이다?
더 복서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알고 보니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설정입니다. 이미 현시점에서 어느 정도 눈치챈 독자들이 많은데요. 스토리를 살펴보면 주인공 유가 상대 선수들을 하나씩 격파해나가면서 성장하는 스토리가 아닙니다. 유는 이미 강합니다, 오히려 상대 선수가 유라는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만화의 포인트입니다.
상대 선수는 유와 싸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깨달음을 얻거나, 자신의 추악한 민낯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이 과정은 흡사, 용사가 최종 보스를 해치우면서 각성해나가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악당의 시점에서 만화를 보고 있는 셈인 거죠. 재밌는 건, 악당 본인으로 그려지는 유는 어떤 악한 감정도 없고, 단지 코치인 K가 시키는 대로 복싱을 할 뿐입니다. 그저 때리고 피했을 뿐인데, 상대가 절망하고 때로는 깨닫는 것이죠.
시점만 바꿨을 뿐인데 흔한 권투라는 소재의 만화가 아예 다르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몰입도도 어마어마합니다. 사실 먼치킨(아주 강한 주인공이 등장해 적을 쉽게 제압하는 종류의 만화)이라는 장르도 이제 흔하죠. 작가는 이 먼치킨이라는 설정을 가져오되 각도를 정 반대로 틀음으로써 신선함을 전달한 겁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요소 + 참신함을 더한 것이죠.
3. 실제와 판타지, 그 중간 줄타기를 잘한다
테니스의 왕자라는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면서 과연 이게 스포츠물인지 마법 사물인지 헷갈렸는데요. 이렇게 스포츠 만화의 경우에는 만화의 박진감이나 즐거움을 위해 ㅓ주인공들에게 게임의 스킬적 요소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과하게 되면 스포츠 만화 본연의 즐거움을 헤치기도 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테니스의 왕자가 그런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더 복서의 경우에는 그 중간 지점을 적절하게 지킵니다. 사실 주인공 유의 존재 자체가 판타지이긴 하지만, 이 주인공이 실제 격투 과정에서 이상한 스킬을 남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유가 상대하는 선수들 모두 사기적인 강함을 지니기는 했지만, 그 강함을 뒷받침하는 스토리들이 모두 존재해요. 가장 최근에 등장했던 다케다는, 친구에게 희망적인 존재로 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수련을 했고 이를 통해서 강해졌다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단순히 '강하다'가 아니라 '이러이러한 과정을 겪었고, 이런 고민을 해결한 결과가 강함이다'라고 작가가 강함을 표현하기에 독자들은 캐릭터 각각의 강함에 대해 납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있다 - 미나토 가나에 작가 '조각들'
더 복서가 인물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빚어내듯 만들어낸 것처럼, 일본 소설 중에서도 캐릭터 하나하나의 디테일에 신경 쓴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미나토 가나에 작가의 [조각들]입니다.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대화로 진행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주고받는 형식으로 서술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독백 느낌의 대화로 서술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a와 b라는 인물이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지만 인물 a의 대답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은 채 b의 행동만으로 a의 행동과 대답을 눈치채게 되는 형식입니다.
예를 들어,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눈을 감으면 어쩔 건데. 피곤한 게 아니라고? 아니 그럼 왜 눈을 감은 건데' 우리는 이 대사를 통해서 상대방이 눈을 감았다는 것, 그리고 피곤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죠.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서술되어있어서, 독자가 책을 읽는 내내 상황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재밌는 게, 오히려 이 상상하는 행위 덕분에 인물 하나하나에 더 집중하게 되고 인물의 성격이나 습관에 대해서 더 선명하게 기억하게 됩니다.
특히 작품이 외모 지상주의와 그것에 따른 스트레스로 자살하게 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이런 연출기법이 더 탁월하게 작용했습니다. 메시지도 확실한 작품이라 추천드리고 싶네요.
5. 마무리
더 복서는 복싱 그리고 먼치킨이라는 전형적인 소재를 전혀 일반적이지 않게 푼 웹툰입니다. 현재 목요 웹툰 3위를 달리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기대되는 웹툰인데요. 앞으로도 유가 마주해야 할 선수도 많고, 그 이후 유가 어떻게 변화될지도 궁금한 웹툰입니다.
조금만 더 늦게 알았더라면, 한 번에 다 몰아볼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면서 동시에 이런 작품을 보게 되어서 기쁘다는 마음도 듭니다. 아직 더 복서를 보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바로 가서 한 번 봐보세요. 장담컨데, 도중에 못 멈추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