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도, 의사도 좋은 네덜란드 병원
네덜란드 병원에서 중증질환 치료 경험을 얻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평상시 아프지 않은 사람지만, 네덜란드에서 생긴 우리 첫째는 다낭신이라는 신장기형으로 태어난 아이이며, 얼마 전 태어난 셋째는 심실중격결손(VSD)를 가지고 태어났다.
첫 째 아이가 태어난 4년 전 우리 부부는 네덜란드어를 아예 못했다. 영어도 쉽지가 않았다. 고심을 많이 하던 끝에 한국에서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한국에는 소위 스타 의사들이 있었다. 소아 신장에 관련해서는 연세 세브란스에 있는 교수님께 문의를 하여 와도 좋다는 답을 얻고 병원 예약을 하고 출산까지 거기서 했다.
한국 병원은 정말 정신이 없는 버스 터미널과 같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풍경이겠지만, 이제 나는 그렇지 않다. 연세 세브란스 어린이 병동 1층에는 아동 신장관련 진료를 보는 과가 있는데, 환자들이 정말 많았다. 의자가 꽉 찰 정도로 아이가 많고, 의사들은 4~5개 정도 되는 진료실에서 쉼 없이 환자를 봤다. 대기열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최소 20개 이상은 떠 있었다. 1시간 이상 대기를 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아이가 한국에서 태어나 두 달 가량 머물고,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출국하는 우리를 고려해 주기 위해 없는 일정을 쥐어 짜 모든 검진을 해 주었다. 한국의 상황에서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급한 상황을 전문의가 고려해주는 것은 하나의 미덕이니 말이다.
어쩌면 병원에 환자들이 미어 터지는 이유도, 의사가 냉정하게 받을 수 있는 환자 이상은 못 받겠다는 말을 못해서 일 수 있다. 환자들이 배려받는 것은 당연해도, 의사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적당한 환자를 받으며 진료를 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겐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이다.
네덜란드의 병원은 정말 한산하다. 한국으로 치면 2.5차 병원 급의 나름 큰 병원에서 첫째 아이 팔로업을 했다. 병원의 로비는 정말 넓고, 대기실은 띄엄 띄엄 자리잡아 있었다. 담당 의사는 5~6명 정도 되 보였는데, 대기실에 5명 이상의 환자가 있었던 적이 없다. 항상 대기실은 조용하고, 한 달 전 쯤 약속된 시간에 의사를 만날 수 있다. 물론 급한 경우 약속을 빨리 잡아준다.
네덜란드에서 만나본 의사는 항상 여유가 있었다. 숨을 쉬는 속도부터 달랐다. 여유롭게 숨을 쉬며 충분히 말을 들어주었고, 여유가 있으니 의사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 있었다. 의사가 진료를 보며 힘들어하고 압박감에 시달린다는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다. 너무 네덜란드 의료를 미화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상 그런 적이 없다.
바로 어제도 셋째 아이 진료를 위해 병원에 방문했다. 이 병원은 한국의 3차병원에 해당하는 위트레흐트 대학병원이었다. 어린이 심장병동에 방문해서 진료를 받았는데, 약속된 시간에 가니 대기 중인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출근해 있는 의사는 2명으로 보였다. 먼저 초음파로 심장을 관찰하고, 이후 간호사가 아이의 체중과 키를 잰 다음, 소아심장 전문의를 만났다.
대화는 역시 여유있고 유쾌했다. 물론 아이의 문제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의료적인 대화 뿐만 아니라 생활에 대해서도, 네덜란드 사회 적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제 네덜란드어로도 대화가 가능하여 감정적인 교류는 더 용이했다. 우리 이후에 대기 중인 환자는 없었다. 의사가 바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병원에 한 시간 가량 머물렀는데, 초음파를 보고 난 이후 아이 두 명 만 대기실에서 봤을 뿐이다.
힘들지 않게 일하는 의사는 환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준다. 여유있는 의사를 만나면 병원에 가는 것이 그렇게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다. 의사가 여유가 있으니 충분한 설명이 되고,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있으니 의사는 감정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어진다. 환자의 부모로 자녀의 질병에 마음은 아프지만, 그래도 뭔가 정상적인 대화를 잘 하고 올 수 있으니 좋다고 생각이 된다.
네덜란드의 의료는 사실 악명이 높다. 왠만큼 아프면 타이레놀만을 처방한다. 사실 처방도 아니다, 슈퍼에서 아주 저렴하게 살 수 있다. 모든 네덜란드 사람들은 왠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는 암에 걸려도 가정의학과 의사가 타이레놀(현지에서는 파라세타몰)만 처방하여 치료 시기를 놓쳐 유명을 달리하는 스토리도 종종 들린다.
그러나 상급의료기관의 의료서비스는 정말 만족스럽다. 확실히 치료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 질병에 대해서는 책임감 있고 조심스럽지만 끈질긴 치료가 이어진다.
한국의 대학병원에는 너무 환자들이 많다. 3차 의료기관 의사들은 근무시간 끊임없는 대기열 속에 있는 환자들을 쉼 없이 맞이해야 한다. 환자들은 1시간 2시간을 기다리더라도 최고의 의사를 만나기 위해 사람이 미어 터져도 기어코 발을 들이밀고 기다린다. 이런 비정상적인 의료 문화는 고쳐져야 한다.
계속 이런 것이 지속되면 의사들은 피곤하고 때로는 신경질적이되고, 환자들은 의사에게 무엇인가를 편하게 물어보기가 쉽지 않다. 의사의 실력은 세계적이지만, 의사들의 삶은 너무 힘들다. 전공의가 갈수록 부족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루 하루 우울함과 싸워나가며 자신의 행복을 갈아 환자를 살리고, 불행한 감정을 공유하는 일은 누구도 하기 싫은 일이다.
행복하게 기적의 의술을 펼칠 공간이 의사에게 주어진다면, 월급은 좀 적더라도 생명을 살리며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의사들이 어려운 전공들을 택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다.
오늘 우리를 만났던 소아심장과 교수와 수련의의 대화를 여기 옮겨본다.
"자 여기 작고 예쁜 여자 아이가 있지"
(청진을 마친 후 자신의 청진기를 수련의에게 넘긴다)
"자 한 번 심장소리를 들어봐"
(수련의는 청진기로 소리를 듣는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수련의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렇지만 긴장감은 없다)
"VSD 아이의 경우 잘 자라는게 중요해. 심장의 문제는 더 많은 에너지의 소모를 불러오고 그로 인해 아이가 잘 크지 못하는거야"
"네 알겠습니다"
"느낌이 어때?"
(수련의는 옅은 미소를 띄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다. 전공의도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