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원천은 끈끈한 가족애
'장인정신'이라는 단어의 일반적 정의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전념하거나 한 가지 기술에 전공하여 그 일에 정통하려고 하는 철저한 직업 정신'이라고 한다.
나는 일본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이 단어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가 당연히 일본이다.
일본은 장인정신을 자신들의 고유한 민족성 중 하나로 여길 만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가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동네 우동집, 라멘집 등 조차도 몇 대를 이어서 그 업이 승계되어 온 경우가 많다는 걸 알았을 때 실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의 일을 평생 연구하고 연마해 나간다는 그 정신이 굉장히 멋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레이시아에서 살면서 느낀 점은 이 나라도 일본 못지않게 장인정신을 귀히 여긴다는 점이다.
특히 화교들이 운영하는 가게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짙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오래된 화인들의 전통 같기도 하다.
당장 집 주변에 있는 로컬식당에만 가봐도 2대째, 3대째 가업을 물려받아 운영되고 있다.
식당 내부에는 개업 때부터의 연대기를 설명해 주는 듯한 글과 사진들이 즐비해 있다.
내가 자주 가는 치킨 라이스집이 있는데 이곳도 아버지 사장님과 아들이 둘이서 운영하는 소박한 가게이다. 사장님이 음식을 준비하고 아들이 서빙을 한다.
자주 가면서 알게 된 점은 두 사람이 이렇다 할 소통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확하게는 소통이 딱히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의 일을 완전히 꿰뚫고 있기 때문에 말 안 해도 알아서 하는 시스템이다.
흥미로운 점이 사장님은 늘 웃고 계시는 반면 아들은 늘 무표정으로 로봇같이 일만 한다. 물론 표정만 무표정이지 고객 응대는 예의 바르게 한다.
어느 날도 어김없이 밥을 먹으러 왔는데 사장님은 안 보이고 아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못 보던 직원이 한 명 생겼다.
오늘은 쉬시나 보다 하고 가볍게 여기고 넘어갔는데 그 후에도 한 달이 넘도록 사장님을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한번 직접 물어봐야겠다.'라고 생각한 날 마침 사장님께서 돌아와 일을 하고 계셨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러 갔다.
그런데 사장님의 얼굴이 너무 안 좋아지셨다. 한 달 새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셨고 턱과 볼 부분의 살이 부어오르고 처진 게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눈빛도 예전과 같은 생기가 없어지셨다.
그럼에도 늘 그랬듯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주시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사장님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셨다는 것을.
차마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는 없었고 오랜만에 봬서 반갑다는 말만 한 채 자리에 앉았다. 밥을 먹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후 사장님이 나오실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고 이런 식이 되었다.
대신 아드님이 변함없이 가게를 열었는데,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 하는 날에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던 그의 얼굴에도 순간순간 일그러짐이 보이곤 했다.
마치 잔잔한 강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 정도의 작은 울림이긴 했지만.
혼자서도 꿋꿋하게 손님들을 응대하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무엇보다 음식의 맛도 사장님의 맛 그대로였다.
처음 이 가게에 왔을 때는 사실 두 사람이 부자관계라는 것도 몰랐다. 일단 생김새가 전혀 닮지 않았으며 성격도 정반대고 둘이 이렇다 할 소통이 없어서 일만 하는 관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나 자신과 다른 (어쩌면 맞지 않는) 사람일지언정 어쨌든 저 사람은 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의 일을 지켜나간다라는 의지가 그 아드님의 눈빛과 꽉 다문 입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로 지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에 대한 큰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서민 자영업자들의 경우 '내 자식만큼은 내가 하는 일을 하지 않게끔 하자.'라는 일념으로 자식들의 학업에 투자하는 풍토가 있어왔다.
당장 나의 부모님이 그런 경우이다. 하루 12시간을 일하며 힘들게 번 돈으로 나의 교육에 투자했고, 그 덕분인지 나와 부모님 둘 다가 나름 원했었던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대학 졸업 후 지금은 대단한 일까진 못되지만 소위 '화이트 칼라 (White Collar)'에는 속하는 일을 하게 됐다.
인생에 정답은 없기 때문에 나의 경우도 물론 가치가 있지만, 위의 치킨 라이스 가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저 아드님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있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의 일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장인정신이란 끈끈한 가족애, 곧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그 원천인 것 같다.